위대한 작가 박경리와의 대담

   
박경리!작가 박경리라는 이름 석자는 우리 일행이 탄 버스가 강원도 원주땅으로 점점 가까워질수록 태산북두와 같은,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에베레스트봉과 동방박사가 아기예수를 만나러갈 때 밤 하늘에 반짝이던 그 큰 별의 영롱함으로 다가온다.내가 문학을 한 이후로 이렇게 생존하는 거봉을 직접 찾아가 뵙기는 이번이 처음이다.내게도 박경리라는 이름 만큼은 도저히 찾아가 뵙지 않으면 안될 자석에 이끌리듯 마력을 지닌 이름임에는 틀림없는가 보다.-문 : 오늘 고향 통영의 예술인들이 박경리 선생님을 만나 뵈러 오셨는데 느낌은 어떠하십니까?=답 : 한 마디로 설레임이지요. 가슴 떨리는 설레임입니다. 그리고 고향 통영사람들을 만나보니 통영사람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 끼게 합니다.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 교수의 사회로 시작된 이날의 대담은 마산 MBC에서 통영의 예술단체 회원들이 대거 참석하면 박경리 선생께서 고향사람들의 얼굴을 보나따나 거절하지 못하시리라는 것을 사전에 포석을 깔고 심혈을 기울여 기획했고 박경리선생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TV에 출연한다고 한 때문이었던지, 고향 통영에 대한 강한 애착과 사랑으로 말문을 열면서 점차 문학과 인생으로 이어지자 3시간동안 거침없고 막힘없이 대천의 융융한 물흐름 같은 소리로 나를 매료시켰다.-문 : 통영에서는 지금 최모씨가 청마를 친일 문학가로 매도하여 기자회견과 서울에서 1인시위까지 했는데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답 : 청마가 친일이라니 안되지요. 동랑(유치진)을 친일파라 하여 남망산 공원에 있던 흉상을 철거를 했던데 동랑이 누구입니까? 우리나라 연극계의 개척공로자입니다. 그 분의 공과를 공평하게 기록하여 기념하면 될것인데 깡그리 무시하면 안되지요. 고향에서 그런일이 벌어졌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박경리 선생님도 그 최모씨가 누구인지 참 안타깝다는 표정이 역력하다.-문 : 선생님의 정확한 생가는 어디쯤입니까?=답 : 명정골에 한때 살았습니다. 제일국민학교(지금의 통영초교)를 다녔고 서문고개를 많이 넘나들었지요. 선생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명쾌하게 밝히지는 않으셨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애매하고 모호한 대답이다.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 물어 볼수도 없다. -문 : 선생님의 <김약국의 딸들>은 통영을 세상에 널리 알린 명작이었습니다.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지명을 따라 문학지도를 만들려고 하는데 선생님의 의향은 어떠하신지요?=답 : <김약국의 딸들>은 내 외가쪽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허구도 있지요. 당시 통영의 정서와 환경과 토속어를 많이 등장시켰지요. 지명을 쫓아 문학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글쎄, 소설은 작가의 가상세계인데......박선생님의 말씀속에서 그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간창골, 서문고개, 명정골, 대밭골, 도래골, 동피랑, 동문, 북문, 세병관, 한실...등의 이름들이 퍼뜩 필자의 뇌리 속으로 스쳐지나갔다. 이런 곳을 잘 연결짓는 문학지도를 만들어 놓으면 좋은 관광상품이 되리라는.-문 :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고향 통영 나들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올 12월 통영시에서 선생님을 초대할 계획인데 응하시겠습니까?=답 : 고향에 빚진 것이 참 많지요. 내 나이가 79살(1926년 10월 28일생)인데 고혈압 수치가 200까지 올라가요.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뭐라 대답할 수 없어요. 사실 제가 고향사람들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얘기하는데 그동안 <토지>집필에 몰두하느라 원주시장과 각 기관단체, 무수한 모임에서 만나자거나 초대해도 일절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보니 세상사람들이 저더러 교만하다느니, 지독하다느니,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려옵디다. <토지> 집필을 끝내고 강원도 도지사의 초대에 딱한번 응했는데 그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자는대로 제가 다 초대받아 시간을 보내면은 이 많고 많은 <토지>를 언제 쓰고 언제 끝내겠습니까? 저는 작가입니다. 작가는 글 쓰는 사람이고 그것에 만족해야지 다른 것에 일체 신경쓰면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끝내니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보내주었지요. 지금은 모두들 이해합니다. 우리 고향 사람들도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문 : 선생님의 고향 통영을 일찍부터 예향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근원은 무엇일까요?=답 : 저는 통영이 작가를 많이 배출한 것은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보아집니다. 그전에는 인근 고성에 속해 있었는데 이순신이 오늘의 해군기지사령부에 해당하는 통제영을 옮기고부터 각지에서 각종 예술쟁이들이 모여들어 눌러앉아 살면서 부터지요. 그 사람들의 정신과 혼이 통영의 아름다운 미항과 결합되어 정서적 충격을 주었고 이것이 확대재생산되어 최고의 경지인 예술세계로 승화한 것이지요.-문 : 끝으로 고향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들려주시지요.=답 :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은 없고, 한가지만 이야기 하지요.제가 어린 시절부터 학창시절, 그리고 직장생활 하면서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고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독서광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눈에 핏발이 서 고생도 했지요. 책을 많이 읽으세요. 책속에 길이 있습니다. 오늘의 <토지>의 원동력은 독서에서부터 나왔다고 봄이 타당할 것입니다.저녁 8시에 시작한 대담이 11시경에 마쳤고 <토지문화관>에서 1박을 한 후 <이육사문학관>을 거쳐 돌아오는 차속에서 나는 작가 박경리 선생의 위대한 작가정신에 혀를 내두르고 새삼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야 했다. 아, 박경리!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책을 읽었다는 그 말씀이 내 폐부를 쿡쿡 찔러 주었다.(이글은 박경리 선생의 대담중 통영에 관한 것을 필자가 구성한 것임.)정해룡<시인, 통영문인협회 회장>jhly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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