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1592년 7월7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찔렀다.

1593년 8월1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 받아 한산도에 통제영 본영을 설치했을 때 지금의 제승당 자리에 막료 장수들과 작전 회의를 하는 운주당(運籌堂)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폐허가 된 이곳에 제 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영조 16년 1740년 유허비(遺墟碑)를 세우면서 운주당 옛터에 다시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 이름 했는데, 지금 걸려 있는 "制勝堂" 현판은 제 107대 통제사 조경이 쓴 글씨이다.

1761년 영조37년, 공의 5대 손 통제사 이태상이 중수했다. 지금의 건물은 1976년, 제승당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제승은 『손자병법』의 “水因地而制流 兵因敵而制勝"(물은 앞에 놓여있는 지형에 따라 물줄기를 바꾼다. 군대도 상대방의 모습에 따라 승리의 전술을 바꿔야 한다.)란 글에서 따온 것이다.

이 밖에도 건물 안에는 제승당기, 제승당중수기, 시, 서문, 시가, 편액 등이 전한다.

1 제승당기(制勝堂記) / 좌의정 조현명(左議政趙顯命,1691년~1752년) 조선후기 문신, 1730년 경상도 관찰사 재직時 한산도 방문, 1740년 우의정 1747년 좌의정, 1750년 영의정 역임. / 조현명의 '제승당기'는 통제사 조경의 장계와 경상도관찰사 때 한산도 방문이 인연이 되어 좌의정 재임 시에 제승당기를 제안 받고 작성한 기문(記文)이다.

趙令公儆 按統制營時 余在籌堂 每見其奏狀 不喜爲變通新奇之策 必以修擧李忠武故事之廢墜者爲先 盖持重守法度 蔚然有故將風焉
조경 공이 통제영 재임 때 나는 비변사 당상관으로 있었는데 매양 올리는 장계를 보았다. 신기한 계책을 변통하니 좋아하지 아니했다. 반드시 이충무공의 옛일을 낱낱이 손질하고 폐하여 손상된 것을 우선적으로 고쳐야하니 모두 신중하게 법도를 지켜야한다. 답답하게도 사정이 있어 장차 이 형세를 어찌할까.
閑山島 在統制營之前舟師之由見乃梁出露梁口者皆過之 實海路之衝也 忠武公嘗擊破倭船七十艘於島之前洋 因卽島中而陣焉 峙粮繕械 隱然爲海上長城
한산도는 통제영 앞바다에 있다. 수군은 견내량으로부터 출발하여 노량 어귀까지 모두 지나다닌다. 실로 바닷길의 요충지이다. 충무공이 일찍이 70척의 왜선을 공격해 쳐부순 섬의 앞바다이다. 이로 인해 즉 섬에는 진(陣)이 있다. 군양미를 쌓아두고 병장기를 수리했다. 은연중에 해상의 긴 성이 되었다.
及元均擠公而代 間嘗陷賊而卒亦走死云 公之在島 立制勝堂以居焉 公旣歿 營始移建於今所處而堂遂廢 於是 公舊址湮歿 且百年矣 乃者趙公登覽而歎曰 是不可一任其荒廢也 遂重建斯堂
원균이 공을 밀어내고 대신하였다. 마침내 적의 함정에 빠져 죽거나 도망갔다고 전한다. 공이 섬에 있을 때, 제승당 자리에서 거주했다한다. 공이 돌아가신 후에 진영을 비로소 지금 있는 곳으로 이건하니 살던 집은 마침내 폐하였다. 이제야 공이 옛 집터에 묻히게 되었는데 백 년만이다. 이전에 조경공이 올라가 보면서 탄식하며 말하길, 황폐한 채로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 했다. 마침내 이 집(제승당)을 중건했다.
其䂓制一皆按公之故 又別爲廨數十架 以爲大操時饗士之所 專書告余請爲記 余曰 諾 忠義之於人 性所固有 然必待勸而後興焉 然則斯堂之作 乃所以勸忠義於南民也
그 법을 만들어 전체가 예외 없이 공의 선례를 살폈다. 또 관아를 세우기 위해 수십 시렁을 몇 부분으로 나뉘어 가설했다. 대규모 훈련 때에는 선비를 대접하는 곳으로 알려졌다. 오로지 글로써 알리고자 나는 기록하기를 청하였다. 내가 말하길, 사람에게 있어 충의를 따라야한다. 사람의 천성은 본디부터 그러하여 굳이 애써 갖추어 놓으니 이후부터 분발해 시작했다. 그런즉 이 집(제승당)을 짓게 되었다. 이에 그런 까닭에 남녘 백성에게 충의를 권장한다.
南民之於忠武公 盖嘗有父母之愛 神明之畏 然歲月旣久 耳目浸遠 昔之家侑而戶祝之者 今至於漸怠 當斯時也 不有以興起之 則民惡能有所勸也 且斯堂也
남녘 백성에게 충무공은 모두 예전부터 부모의 사랑과 같다. 천지신명을 경외하듯, 이미 오래전부터 자연스레 세월이 흘러가니 사람들의 이목이 더욱 멀어졌다. 옛날에는 집에서 배향하고 집집마다 제사를 올렸는데 지금은 점점 그만두게 되었다. 그 당시의 감동이 일어나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즉 백성은 다소 권장하는 바를 싫어한다. 이런 집을 구차하게 생각한다.
卽公所嘗盟山誓海 皷魚龍而振草木者也 其喑啞叱咜 赫然精爽之可畏者 若可以彷彿其一二 而東臨馬島卉服之鄕 北瞻露梁星隕之墟 風怒雲屯 鯨鰐呑噬 山哀浦思 猿鶴悲吟
곧 일찍이 공이 산과 바다에 맹세하던 곳이며 어룡이 고동치고 초목이 진동하던 곳이다. 벙어리를 질타하고 찬란한 신령스런 기운에 두려워하는 것은 그중 한둘을 방불케 해도 가치 있는 것이다. 동쪽에는 대마도 오랑캐 땅이다. 북쪽에서 노량에 별이 떨어진 터를 바라본다. 바람이 성난 듯 구름을 모아 고래와 악어를 씹어 삼킨다. 산악도 슬퍼하고 강물도 시름겨워하고 원숭이와 학이 슬프게 읊조린다.
雖尋常行旅過之 莫不竪頭髮裂目眥 而况以南民父母之愛 神明之畏 其所以憑依想慕 激昂慷慨於中者 尤如何 而其於敵愾之忠 死綏之義 亦將競勸而不可遏矣 此在固邊圉捍王室之道 豈小補也哉 余嘗忝按嶺節 浮海過其地 想像英風彷彿者久之 今於斯役也 以托名楣間爲幸 而不宜以不文辭 爲之記如此云
아무리 대수롭지 않게 나그네로 지나친다 해도 눈을 부릅뜨고 머리털을 세우지 아니할 수 없다. 하물며 부모를 사랑하는 남녘 백성인데 천지신명을 경외하듯, 의지하고 사모하는 마음인 까닭이다. 격앙되어 감개무량한 사람은 더욱 어떨까? 그것이 적에게 분개하는 충성심이고 전사한 정의이다. 또한 (이 보수공사에) 장수가 다투듯 힘쓰니 막을 수가 없다. 이는 굳건하게 국경을 방어하며, 국가의 도리이기도 하니 어찌 작은 보수공사라 하겠는가? 내가 마침 영남의 관찰사가 되어 바다 건너 그 곳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상상한 영걸스런 풍채가 마치 오래된 듯 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일이 이루어졌다. 이름을 빌려 다행하게도 문미 사이에 쓰는데 글 지을 줄 모른다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하여 기문(記文)을 삼는다.

2. 제승당 중수기(制勝堂重修記) 후손 제121대 통제사 5대손 이태상(李泰祥,1760년8월~1762년6월 재임)(後孫統制使泰祥) 作. / 이봉상(李鳳祥), 5대손 94대 통제사 1722년1월~1723년3월 재임.

堂卽我先祖壬辰駐兵時所建也 中間興廢之跡 趙相國,鄭承宣之記詳矣 一自虞候留防之移設於見乃梁 日月侵尋 軒檻無主 又遺墟碑閣
제승당은 나의 선조가 임진난 때, 군대의 주둔지로써 세운 곳이다. 중간에 흥폐 되었던 유적이다. 조상국(조현명), 정승선(承宣 : 승선원(承宣院)의 한 벼슬)의 상세한 기록이다. 우후(虞候,종3품)가 견내량에서 옮겨 설치한 군대를 머물게 하여 방어하게 한 곳인데 세월이 점점 흐르니 난간마루에 주인이 없어졌다. 또한 유허비각도 마찬가지다.
卜地湫洿風雲儲胥之區 瓦欹木朽 龜螭莓苔 人之過之者 未嘗不徘徊俯仰 愴雲水之俱白 惜軌躅之日陳 藐余孱孫 用是爲懼 乃敢鳩工相地 久遠是圖
살만한 곳을 가리려고 우묵한 웅덩이 같이 바람과 습기가 쌓이는 곳을 구분하였다. 기와는 비뚤어지고 나무는 썩어가고 거북과 교룡에도 이끼 덮었다. 사람들은 다 지나간 것이라 한다. 아닌게 아니라 굽어보고 우러러보기가 망설이게 된다. 어지러운 구름과 물이 모두 흰빛 속에, 본보기가 된 옛 자취를 날마다 늘어놓기가 애석하다. 먼 잔약한 후손인 나는 이 때문에 두려워서, 이에 감히 일꾼(풍수지리가)을 모아 땅을 살폈다. 몹시 오래되어도 알 수가 있었다.
堂則仍趙公之舊而脩之 閣則就堂後而移之 易其腐缺而新其漫漶 夫堂之興廢 固不足爲我先祖輕重 而若所謂水不忍廢 地不忍荒者
제승당은 조공(조경 통제사)에 의해 예전에 새로 수리했다. 비각(碑閣)은 제승당 뒤로 옮겼다. 썩고 이지러진 것을 바꾸니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새로워졌다. 저 제승당의 흥폐로써 실로 나(李泰祥)의 선조 업적에 대한 경중을 말 할 바가 아니나, 이른바, 정자(程子)의 안락정시(顔樂亭詩)에 “물을 차마 폐지하지 못하고 땅도 차마 황폐하게 되지 못한다(水不忍廢 地不忍荒)"는 말과 같다.
亦人情之所不已而爲今日準備語也 後之君子其亦毋以我一家之私 而隨壞繕治 俾免湮圮 則登斯堂而撫遺迹者 庶其油然而感 喟然而興 競有勸於忘身殉國之義也歟 此固趙公當日重建之意 而亦不肖區區之所竊望於人人云爾
또한 인정에 의한 바, 오늘 준비한 말로 그치지 않고 행한다면 후세의 군자가 그것 역시 나의 일가의 사사로움이 없다하겠는가? 그런데도 곧바로 무너져서 보수하고 바로잡아,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면하도록 하였다. 만일 이 제승당에 올라 갈 때면 유적을 어루만져라. 아마 그 유연함에 감응하여 한숨을 쉬며 탄식이 절로 일어날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의(義)를 다투듯 권장하리라. 이것이 진실로 조경 공이 그날 중건한 뜻이다. 또한 못나고 어리석고 구구하여, 사람마다 이와 같이 남몰래 그리워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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