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년 만에 고향 통영을 찾은 한국문단의 거목 박경리 선생님은 영락없는 우리의 따뜻한 이웃 할머니였다. 고향 찾아오시기 전날 밤 잠 한숨 못 주무셨다 노 작가의 눈물어린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척에서 선생님을 볼 수 있었던 기회가 세 번이나 있었다. 2002년 공무원문학회에서 주관한 원주 문학기행이 첫 번째이고, 작년 MBC 창사기념 대담시 방청객으로 참여한 것이 두 번째이며, 선생님의 고향방문시가 세 번째이다. 선생님을 더 알기위해 그럭저럭 구입해서 읽은 책도 몇 권째다. 선생님이 있어 통영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삼는 이가 어디 나 뿐이랴. 어디가도 기죽지 않고 떳떳한 것은 박경리 선생님을 비롯한 예향 통영을 빛낸 기라성 같은 문화예술인들의 이름 덕택임을 나는 잘 안다. 오늘 다시 네 번째 선생님을 만나는 일행들 틈에 끼였으니 대단한 영광이다.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지명 내력을 표지석으로 만들어 현장에 세우는 ‘예술인 문화표석 설치사업’을 하기 위해 선생님의 육필원고를 받으러 가는 길이다. 살을 에는 동장군도 물러서고 원주로 가는 길은 너무도 포근했다. 이대로 봄이 오면 좋을 날이다. 일행은 류태수 예총회장, 장창석 예총부회장, 통영시 관계공무원과 필자 등 네 명이었다. 통영을 떠난지 불과 네 시간 만에 우리가 탄 차량은 벌써 남원주 나들목으로 접어든다. 얼음이 얼지 않도록 밤새 오리들이 날개 짓을 했다는 호수가 있는 연세대 원주캠퍼스를 지나니 토지 문화관이다. 어릴 때 다녔던 외갓집 가는 기분이다. 벨을 누르고 통영에서 왔다고 했더니 문 바깥까지 마중을 나오신다. 안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람냄새가 확 풍긴다. 선생님의 안방까지 구경할 수 있다니 상상도 못한 큰 성과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것이 선생님의 성격을 말해준다. 시장님께서 이미 전화를 하신 터라 용건부터 꺼냈다. 재단법인 한산대첩제전위원회 고문직 수락과 육필원고를 받으러 왔다고 말씀 드렸더니 간밤에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와 밤새 얘기를 나누느라 잠 한숨 못 주무셨다며 원고는 다음에 써 주시겠단다. 당뇨가 더 심해졌다며 고문직 승낙서를 자필로 쓰기 위해 꺼내신 주민등록증과 인장, 묘한 느낌이다. 사람은 누구나 주민등록증을 소지하고 때때로 인장을 날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우리와 더 가까워지는 것만 같다. 작년 여름에 못 받아 온 사인을 받기위해 챙겨온 선생님이 쓰신 책에 일일이 사인을 해주시고, 내가 고향 사람에게 줄 것이 책 밖에 더 있느냐며 작년에 쓰신 ‘생명의 아픔’에도 꼼꼼히 받는 사람의 이름을 새겨 주신다. 사진도 같이 찍자며 활짝 웃어 보인다.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통영이야기만 나오면 어디서 힘이 나는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잘도 하신다. 언제 또 고향 한 번 다녀가시라는 말씀에 이제 별 아픈 곳은 없지만 당뇨가 심하다. 왠지 자꾸 피곤하다. 건강부터 회복해야 고향을 갈 수 있겠단다. 통영으로 문학기행을 온 사람들이 선생님의 생가를 묻는다며 정확히 선생님이 태어나신 곳을 알려달라는 우리의 제의에 선생님께서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옛 통영 경찰서(지금의 충무데파트 자리)자리에 살았는데, 어머니가 산기(産氣)가 있어 서문 안에 있던 외갓집인 새집(새로 지어서 새집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음)에서 나를 낳았다. 이후 포교당 못샘 근처와 관창골에서 줄곧 살았다. 나의 아버지는 열네 살, 어머니는 열여덟 살에 결혼해 어머니 나이 스무 두 살에 나를 낳았다. 외가, 친가 할 것 없이 우여곡절이 많았다. 때가 되고 건강해지면 내가 태어난 배경 등 가족사에 대해 기록하겠다. ‘김약국의 딸들’도 나의 외갓집 이야기다. 엊그제 고향 다녀 간 소감에 대해 묻자 고향 통영은 어머니의 태와 같은 곳이다. 죽을 때는 고향으로 간다. 통영은 음식, 기후, 역사, 기질 등 너무 독특하고 특별한 곳이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통영사람들이다. 통영처럼 예술가가 많이 배출된 곳이 없다. 모를 부어 놓은 것처럼 많다. 모두가 놀라고 부러워한다. 그 다음이 박목월, 김동리 등을 배출한 경주다. 진주, 통영은 토지의 바탕이다. 통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외로 많다. 통영을 사랑하는 외지인들의 이야기를 모으면 근사한 작품이 될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밀레기념관은 아주 초라한데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이 마을은 음식, 그림, 골동품 등을 팔아서 먹고산다. 이들은 밀레 한 사람을 팔아먹고 산다. 이런 생가나 기념관은 자연에 가까우면서 그가 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야 한다. 통영은 충무공 이순신을 부각시켜 먹고 살아야 한다. 통영은 이순신의 위대한 혼을 세계에 알리는 쪽으로 접근해야한다. 이순신은 패권주의자가 아니고 전쟁을 막은 장수다. 세계적인 인물로 집중 연구할 가치가 있다. 군사 전문가들이 모두 통영에 와서 이순신을 연구해야 한다. 이순신의 전략전술을 연구하기 전에 그의 인간정신을 연구해야 한다. 통영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 시민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통영의 위상과 품격을 더 높이고 모티브를 만들어 출향인들을 불러 들여야 한다. 나는 건축에 아주 흥미가 있다. 녹지대를 더 만들고 아파트도 그만 지었으면 좋겠다. 죽림에서 바다를 보면 숨통이 틔었는데 아쉽다. 물도 들어갔다 나왔다 해야 한다. 도시에 공간이 없다. 공간은 무언가 기다리는 것이다. 토박이들끼리 북적거려 보았자 그게 그것이다. 외부 사람들이 왔다 가야 통영이 부자가 된다. 외지인들이 와서 돈을 뿌리고 가도록 해야 한다. 산양면(읍)은 자연을 많이 보존하고 있어 다행이다. 옛 부두도 복원해서 어장배도 두면 좋겠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수동 쪽에서 바라본 한실(지금의 인평동)은 참 아름다웠다. 해방 이후 서울에 살 때인데 ‘통영소반 사세요’라는 소반장수의 고함소리를 듣고 얼마나 반갑고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서울에서도 ‘통영소반’이라고 하면 잘 팔렸다. ‘통영갓’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드라마를 보면 벙거지 갓을 쓰는데 참 볼 품 없다. 통영갓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옛날에는 통영사람들의 눈이 높았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시민들이 아름다움을 알아야 한다. 당장 군불솥에 넣을 장작도 아름답게 재는 것이 통영사람들이다. 할머니 상(喪)때 본 모삼 등 의식이 너무 아름다웠다.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중구는 나의 먼 친척 할아버지가 모델이고 그 할아버지는 소목장 일을 하였다. 당시 양반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소목장 일과 제모(갓)만드는 일, 농사짓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만드는 것은 모두 예술품이었다. 이런 것들을 보고 나도 안목이 높아졌다. 자개장 보다 소목장을 더 알아주었다. 원주는 어떤 곳인가라는 질문에 지금에야 문화에 대해 조금 아는 것 같지만 작가 의식과는 달리가고 있다. 원주는 군사도시다. 손주 때문에 이곳으로 왔고 20여년 만에 많이 변했다. 공무원들이 문화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더라. 문학정신으로 작가를 보아야한다. 이 토지문화관은 나와 관계없다. 토지공사의 토지문화관이다. 나의 집을 헌 대신 이 문화관을 지었다. 별 것 아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 중 주된 것은 통영에 많이 주어야 할 것이다. ‘김약국의 딸들’ 원고를 태워 없앤 것이 아쉽다. 본래의 모습을 보존해야 하는데 단구동의 내가 살던 집도 너무 근사하게 치장을 했다. 있는 그대로 돈 안들이고 보존해야 하는데 속상하다. 안방에 고이 간직한 세 가지 물건을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언젠가 할머니집에 불이 났는데 아버지가 불난 집에서 유일하게 가져 나온 것이 할머니의 장(소목장)이었는데 아버지가 나에게 물러 주었고, 내가 서울로 가져가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이는 나의 삶의 근본이라 여기며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해방되던 해 구입한 재봉틀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나의 생활이다. 마지막으로 걸레 같이 변한 사전은 나의 글(문학)이다. 중화학공장 수백 개 지은 것보다 값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하소설 ‘토지’를 쓴 작가로 보기에는 너무도 평범하고 소박한 우리의 이웃 할머니 박경리 선생님!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자긍심을 심어 주었듯이 이제 우리 또한 선생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 현관문까지 나와 고향사람들을 배웅하는 노작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별 앞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선생님의 건강을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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