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초암 박성초(문주)와 함께 북포루에 올라(同朴蕉庵,朴性初(文宙) 登北舖樓) / 강위(姜瑋,1820년~1884년),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天高海闊北城樓 하늘은 높고 바다는 넓은 북편 성(城) 누각에
風緊雲繁八月秋 바람 몰아치고 구름 무성한 팔월(음)의 가을이로다.
名州形勝同陘口 이름난 고을의 형승은 지레목 입구 같고
老帥風流似石頭 늙은 장수의 풍류는 돌대가리 같네.
大陸眞看一毬泛 육지가 참으로 공 하나에 떠다니듯 보이는데
神山不與六鰲流 삼신산도 떠도는 여섯 척 자라와는 함께하지 않는다.
悠悠空碧渾無際 푸른 하늘 아득히 온통 끝이 없어도
古異神情不可收 옛날 신묘하고 기이한 뜻을 거두기는 어려울세라.

2) 통영영해루 차운(統營映海樓次韻) / 김지남(金止男,1559년∼1631년)  조선 중기의 문신.
海邊舟楫壯關防 해변의 배와 돛대, 견고한 관방,
專制三方策亦良 삼면을 통제하고 대책 또한 훌륭하다.
山勢盡頭平地小 산세의 막다른 끝에 평지는 적고
海門通處碧天長 바다 어귀는 각 곳으로 통하고 푸른 하늘은 멀어라.
擁樓鼓角風傳響 전함의 고각소리 바람타고 울리니
蘸水星河影動芒 물에 담긴 은하수 그림자가 빛살에 흔들거린다.
老子年來能斷酒 이 늙은이가 요즈음 술을 끊었는데
登玆不覺倒瓊觴 북포루에 올라보니 옥술잔에 술 따르는 줄도 몰랐네.

◯ 김지남(金止男) : 1559년(명종 14)∼1631년(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정(子定), 호는 용계(龍溪). 김순성(金順誠)의 현손이며, 부친은 영동현감 김표(金彪)이다. 재종숙 김양(金讓)에게 입양되었다.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1593년 정자가 된 데 이어, 지제교‧수찬‧교리‧응교‧정언‧사간‧장령‧집의‧필선‧보덕‧승지, 예조‧병조‧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집의로 있을 때, 박응서(朴應犀)의 무고로 영창대군을 죽이자고 주장하는 지평 정호관(丁好寬)을 면박했고, 인목대비를 폐하려는 이이첨(李爾瞻)일당에 반대하면서 그 죄상을 폭로하였다. 외직으로 행주판관, 경기‧평안‧전라‧강원도의 도사를 거쳐서 경상감사 및 남양‧순천‧상주‧청풍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때 임명된 조신들이 외직에서 모두 파직되었으나 특별히 유임되었다. 저서로는 《용계유고》가 있다.

3) 충렬사 2수(忠烈祠 二首) / 송병선(宋秉璿,1836년~1905년) 송시열의 9대손, 조선말기 유학자 문신 애국자,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
松杉蒼鬱古祠前 소나무 삼나무 울창한 옛 사당 앞에서
颯爽靈風動劒筵 시원한 바람소리, 신령스런 바람에 흔들리는 칼.
八賜皇明紀功大 명나라 황제의 여덟 가지 하사품이 큰 공로를 기념하는데
千秋孰不仰雲天 천추에 누구인들 구름 덮인 하늘 우러러보지 않으랴.
長懷忠武善揚兵 충무공이 훌륭히 병사를 일으킨 일을 길이 사모하는데
人說板橋夷膽驚 사람들이 말하길, 널다리(판교)가 오랑캐 간담을 놀라게 했다네.
今作一家羞莫雪 이제는 일가가 되어 부끄러우니 논하지 말라.
百年志鬱何時平 백년의 답답한 감정 언제쯤 풀어질까.

4) 알충렬사 시원중제군(謁忠烈祠 示院中諸君) 충렬사를 방문해 원중(院中)의 그대들을 보며. / 강위(姜瑋,1820년~1884년),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歷落嶔崎老此生 험준한 세상에 내려와 이승에서 늙어 가는데
試爲院長亦奇情 잠시 원장이 되니 또한 기이한 정(情)이로다.
未知節制猢猻陣 절제를 알지 못하는 원숭이 대열이라,
已見周旋鴈鶩行 기러기나 오리걸음으로 맴도는 것만 보일 뿐.
欹枕天風來瑟瑟 베개 베고 누웠는데 하늘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凭闌海水貯盈盈 난간에 기대보니 가득 찬 바닷물이 찰랑이네.
總藉先賢流澤遠 모두가 선현에 의지하여 멀리 떠도는 덕분에
魚龍草木共承平 어룡 초목이 모두 태평하도다.
問訊名園萬竹安 묻노니 이름난 동산엔 울창한 대나무 안온하지.
綠天風雨動微寒 푸른 하늘 비바람에 찬 기운이 으스스하다.
一齋人集新知好 한 번씩 재계하고 모두 모여 새로 주관하여
千里書携舊讀殘 천리서 온 글을 가지고 예전에는 남은 글을 읽었다.
碧酒中年原易感 중년은 원래 푸른 술에 쉬이 감응하니
靑灯遙夜幾回闌 푸른빛 등잔이 이슥토록 몇 번이나 가로막는지?
諸公俱有凌雲氣 여러분 모두 구름을 뚫을 기세이지만
莫學癡翁鋏屢彈 어리석은 늙은이가 부젓가락 자주 두드리는 것은 배우지 말라.

[주] 벽통주(碧筩酒) : 삼국 시대 위(魏)나라 정각(鄭慤)이 삼복(三伏) 때마다 사군림(使君林)에 가서 피서를 했는데, 항상 큰 연잎에 술 석 되〔三升〕를 담고 연의 잎과 줄기 사이를 비녀로 뚫어서 술이 줄기를 타고 내려오게 하여, 마치 ‘코끼리의 코〔象鼻〕’처럼 구부려서 줄기 끝에 입을 대고 술을 빨아 마시면서 이를 벽통주(碧筩酒)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酉陽雜俎 酒食》

5) 강한루(江漢樓) / 강위(姜瑋,1820년~1884년).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강한(江漢)은 군사요충이며 양자강과 한수가 만나는 곳으로 이름난 중국 호북성의 경승지라고 한다. 1840년에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이 여기에 누각을 지었을 때 추금(秋琴) 강위(姜瑋)가 충무공의 위업을 강한과 관련된 고사에 연관 지어 강한루(江漢樓)라 명명했다. 현 누각은 전형적인 조선의 팔각지붕 양식으로 1988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試溯神仙夢 신선의 꿈 잠시 거스르다가
重開漢上襟 강한루에 올라 옷깃을 연다.孤月行天遠 외로운 달은 하늘 멀리 떠가고
衆流到海深 수많은 물갈래, 깊은 바다에 이르네.
逢人問古地 만난 사람에게 옛 땅을 물으며,
對酒憐初心 마주한 술에, 본디 마음 가련토다. 忠烈祠堂在 충렬 사당이 있는
天涯已再尋 하늘 끝, 재차 찾아왔을 뿐인데.

6) 강한루만조(江漢樓晩眺) 강한루에서 저물녘 경치를 보며 / 강위(姜瑋,1820년~1884년),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海上名園萬竹風 해상의 이름난 동산에 많은 대나무가 바람에 일고
沈酣竟日綠天中 온종일 술에 취하니 푸른 하늘 가운데로다.
覊遊未覺光陰轉 나그네 떠돌다 세월 가는 줄 모르는데
安石花飛滿院紅 석류꽃이 날리니 온 동산이 붉구나.
搏桑萬里洒天風 만 리 박상(搏桑)에서 시원한 하늘 바람 불고
身在琉璃鏡影中 몸은 유리 같은 수면의 그림자에 있네.
千樹珊瑚誰網得 천 그루 산호수(珊瑚樹) 누가 그물로 잡으랴.
滄波落日浸殘紅 푸른 물결 위 석양이 남은 붉은 잎에 잠긴다.

[주1] 안석화(安石花) : 석류화(石榴花)는 안석국(安石國)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안석류(安石榴)라는 이름이 붙었다.
[주2] 박상(搏桑) : 동쪽 바다의 해 돋는 곳에 있다는 신목(神木)을 이르는데, 또는 그 신목이 있는 곳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3] 산호수(珊瑚樹 ; Ardisia pusilla) : 앵초목 자금우과의 상록 작은관목. 털자금우라고도 한다. 높이 5∼10㎝. 줄기는 땅 위를 기며 전체에 털이 많다.

7) 미륵산 지나는 도중에(彌勒山途中經過) / 오횡묵(吳宖默,1834~?)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년).
爲見黃茶種 누런 차나무 씨를 보기위해
故尋蘇氏居 소씨가 사는 곳을 찾아갔다.
鍾聲知有寺 종소리가 절이 있음을 알리는데
竹韻更停車 대나무 소리에 수레를 멈춘다네.
谷鳥鳴相應 계곡의 새들은 서로 응하며 울고
林花笑欲舒 숲속의 꽃은 피우려고 웃는구나.
經來奇翫物 지나오다보니 경치가 기이한데
浮石已聞諸 물에 떠있는 돌 이야기 이미 들었다네.

8) 용호방구(龍湖訪舊) 용호에 옛터를 찾아 / 강위(姜瑋,1820년~1884년),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勝地經來五十三 승리의 땅을 지나온 53세에
又參知識到天南 거듭 참선하며 하늘 남쪽에 이르렀다.
淋漓且盡杯中物 땀이 흥건해도 우선 잔속의 술이나 기울이며
忼慨聊爲紙上譚 울분을 터뜨리곤 애오라지 종이에다 글을 쓴다.
萬里荒雲開絶塞 만 리 거친 구름이 먼 변방을 열고
一規凉月照寒潭 언제나 서늘한 달은 차가운 못의 물을 비춘다.
風塵往蹟憑誰問 바람과 먼지 낀 지난 자취, 누구에게 물어보랴
淸水神鱗睡正酣 맑은 물속 신령스런 물고기 잠도 깊어가네.

9) 박성초 홍윤경(종주)와 함께 미륵산 꼭대기 봉수대에 올라(同朴性初洪允卿(鐘胄) 登彌勒山絶頂烽臺) / 강위(姜瑋,1820년~1884년),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赤藤扶我上層巒 등 막대로 날 붙들어 겹겹의 산에 올라가니
兩腋天風陣陣寒 양 겨드랑이에 하늘 바람 불어 점점 추워지네.
雲山隱約強鄰近 구름 낀 산이 희미한데 강한 이웃이 가까이보이고
天海靑蒼大界寬 짙푸른 하늘과 바다, 큰 세계가 광활하다.
無數帆檣乘浩渺 수많은 돛대 배에 타는 모습 넓고도 아득하고
尋常爟火報平安 평범한 봉홧불이 편안함을 알린다.
南來始躡靈山頂 남쪽에 와서 비로소 오른 신령스런 산꼭대기,
慈氏奇緣締喜歡 자씨보살과 기이한 인연 기쁘게 맺으리라.
미륵은 자씨보살(미륵보살)을 번역한 것이다.(彌勒 譯語慈氏)

10) 위와 같은 분들이 나를 데리고 백운재에 다시 돌아와 밤술을 마시다(同人携余 復至白雲齋 夜飮) / 강위(姜瑋,1820년~1884년),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登臨天海共靑蒼 올라서니 하늘과 바다 모두 짙푸르고
遙夜無塵月有光 긴긴 밤 티끌 없어 달이 빛나구나.
戍鼓殘時來鴈影 시간이 다된 때 수루 북소리 울리니 기러기 그림자 돌아오고
島雲深處潑龍香 섬 구름 깊숙한 곳에서 용향(龍香)이 솟아난다.
重游塞上烟霞變 다시 노니는 변방엔 안개와 노을이 바뀌고
此去湖南道路長 이제 떠나려는 호남은 갈 길이 멀다.
十載與君尋舊夢 10년 동안 그대와 묵은 꿈을 꾸었는데
天涯一醉是名鄕 먼 변방에서 한번 취하니 여기가 이름난 고을이네.
海岳優游頌聖恩 유유자적한 바다와 산, 임금의 은혜를 칭송하고
烟花千里到轅門 연화(烟花)는 천리에 걸쳐 원문에 이르네.
遲日參差脩竹影 봄날 물위엔 수죽의 그림자 들쑥날쑥,
滿山磊砢老松根 온 산엔 노송(老松)의 뿌리 장대하다.
花間群燕爭留影 꽃밭의 제비들은 다투어 그림자 드리우는데
水面孤鴻亦印痕 물 위의 외기러기는 흔적뿐이네.
安得中州諸好事 어찌 바닷가에 여러 좋은 일이 있지 않으랴.
卷中海客共琴尊 책속에는 바다 찾은 길손이 거문고와 술을 함께한다지.
[주1] 용향(龍香) : 좋은 먹 이름이다. 용향위가보(龍香韋家寶)삼국(三國) 시절에 위탄(韋誕)이 좋은 먹을 만들었다고 함.
[주2] 연화(烟花) : 태평세월 속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꽃이 핀 민가의 광경을 말한다.

11) 서제(書齊) / 통영잡영10절(統營雜詠十截) 中. 오횡묵(吳宖默,1834~?)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년).
東堂峰下水彎弓 산 아래 관사는 바다가 굽어 돌아 흐르고
野樹陰陰壇杏紅 그늘진 들판의 나무 터에는 살구가 붉네.
莫道此營徒用武 이 진영의 군사들 무예가 쓸 만하다 말할 필요 없으며,
數間猶有讀書宮 두서너 칸 집은 오히려 글을 읽기에 대궐이로다.

[주] 백운서재(白雲書齋)는 통영시 도천동 854번지에 위치하며, 본관 제주, 자(字)는 문언(文彦), 호(號)는 백운암(白雲菴)인 고시완(高時完) 선생이 가난한 집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던 서당(書堂)이다. 두어 칸의 집을 짓고 강당(講堂)을 여니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실학(實學)의 연구에 몰두하고 이(理)와 기(氣)의 흐름을 밝히는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 백운서재(白雲書齋) : 문화재자료 제9호, 통영시 도천동 854번지에 위치한 백운서재는 고시완(高時完) 선생이 가난한 집 자제들즐 모아 가르치던 서당(書堂)이다. 선생의 자(字)는 문언(文彦), 호(號)는 백운암(白雲菴)으로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선생은 고대관(高大觀)을 아버지로 해주 오씨(海州吳氏)를 어머니로 하여 정조 7년(1783) 2월 22일에 태어났다. 형(兄) 시양(時瀁)과는 어릴 적부터 우애가 지극했을 뿐 아니라 면학에도 함께 열중하여 형제가 나란히 학문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선생은 두뇌가 명석하고 성품이 호방하여 학문에만 전념할 뿐 출세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실학(實學)의 연구에 몰두하여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깊이 탐구하고 이(理)와 기(氣)의 흐름을 밝히는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일찍이 천암산(天 山) 기슭에 두어 칸의 집을 짓고 강당(講堂)을 여니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항상 바른 몸가짐으로 성의껏 가르치고 재물을 탐하거나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바위틈에서 샘물을 끌어다가 앞뜰에 조그만 못을 만들고 주위에 꽃과 나무를 심어 아담한 정원을 만들었다. 못 속에서 노니는 고기와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즐기면서 때로는 거문고로 산과 바다에 화답하고 혹은 붓을 들어 풍월을 노래하니 그 고아한 자태는 진실로 세속의 경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이러기를 여러 해 하던 어느 날 밤, 꿈 속에서 대인(大人)이 홀연히 나타나 반석에 걸터앉아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 성(誠)을 되돌려라" 하는 것이었다. 그때 시냇물 소리에 소스라쳐 눈을 뜨면서 깨달으니 이것이 진리대각(眞理大覺)의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다시 책을 끌어당겨 학문 탐구에 매진하니 고금의 경서 연구에 걸림이 없고 진리의 근원을 밝히는 데에 막힘이 없었다. 이에 「역대상도해(易大象圖解), 상·하권과 「중용성명도(中庸性命圖), 「몽대인기(夢大人記), 「혹인문답(惑人問答) 등 여러 편을 저술하였고, 수상문(隨想文)파 사실기록문(事實記錄文)도 여러 편이 있는데 모두 성리학(性理學)을 바탕으로 한 우주의 본체와 인성(人性)을 논한 역작이었다. 평생을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시던 전생이 헌종 7년(1841) 12월 21일 향년 59세로 타계하시니 제자들이 태평동(현 인평동) 국재(局峙) 언덕에 유택을 마련하고 장례를 치렀다. 부인은 인동 장씨(仁同張氏) 동추(同樞) 지희(志禧)의 따님인데 선생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요절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강당 뒤 북쪽에 사우(祠宇)를 세워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니 옛날 향선생(鄕先生)이 돌아가시면 사(社)에서 제사 지내던 것을 본뜬 것이다.   선생의 문집이 여러 번 화재를 입어 몇 편밖에 전해지지 않아 애석하다. 지금도 서재의 뜰에는 못과 대나무 등 옛 모습이 일부 남아 있고, 유림에서 매년 음력 8월의 하정일(下丁日)에 채례(采禮)를 모시고 있다. 백운 선생에 대한 일화는 많다. 그런데 역(易)에 달통했던 고인들의 일화가 대개 그렇듯 신비적으로 채색되어 전설화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통제영에서 군점행사를 벌이고 있던 어느 날, 서당의 학동들이 강구 안과 앞 바다에서 펼쳐지는 수조(水操)를 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백운선생은 학동들을 불러 앞뜰의 못 주위에 앉혀놓고 못 가의 계수나무 잎사귀를 손으로 훑어 못에 뿌리니 잎사귀 하나 하나가 전선(戰船)으로 변하더니 대오를 지어 수조를 취하는 것이 일사불란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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