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라 파운드를 생각하며

   

요즈음 때 아니게 밑도 끝도 없이 친일청산 논란이 한창이다. 웬만한 도시의 이름깨나 한다는 사람치고 시민단체에 가입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고 자신이 가입한 시민단체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도덕성과 청렴성을 앞세우고 자신들이 설정한 가치기준과 맞지 않을 땐 가차없이 상대방을 공격해 대는 실정이다.


그렇다 보니, 선명성 경쟁이라도 하듯 무리한 수를 두어서 시민속의 단체가 아닌 저들만의 단체라는 시민들의 빈축을 종종 사기도 한다.


물론 앞선 시기에 시민단체들이 우리사회에 끼친 순기능을 폄하하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위암 장지연(1864-1921)선생의 손자인 장재수씨가 위암의 친일행적을 제기한 김경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고소한 신문기사를 보면서 필자는 착찹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장지연선생의 친일을 제기한 김경현이라는 사람이 그 사실을 보도한 언론이 자신의 주장과는 다르게 보도했다며 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슬그머니 발을 빼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이맘 때, 필자가 속한 통영문인협회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을 당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청마를 친일문학가라고 쓴 대자보를 목에 걸고 시위한 사람을 유족들이 검찰에 고소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 사람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경찰관이 심문을 하니, “자기자신은 그런 의사가 없었는데 누가 시켜서 그랬노라.”는 대답을 들으면서 필자는 맥이 풀리고 실소를 금치 못했었다.


이렇듯 자기자신은 확신도 없으면서 역사적 사실이나 검증없이 누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덩달아 우선 저질러 놓고 보자는 식으로 막무가내로 친일혐의를 덧씌우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 그런 일을 한다고 자기자신을 누가 투사나 지사나 열혈애국애족주의자라고 절대로 불러주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필자는 에즈라 파운드의 시를 좋아한다. 엘리어트의 ‘황무지’라는 시의 진가를 발견하여 세상에 엘리어트를 널리 알려준 시의 스승이다.


그는 1941년 이탈리아 방송을 통해 조국이었던 미국을 비난했다.

 

1945년 세계2차대전이 끝났을 때, 파시스트에 동조한 일로 인하여 국가반역죄에 몰리게 되었다. 미국으로 호송, 정신이상자로 판명, 12년간에 걸친 정신 치료, 석방, 이런 생애가 그의 시와 더불어 생의 한 단면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에즈라 파운드의 시를 얘기하면서 아무도 그를 국가반역자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만 시는 시로서만 받아들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시민단체에서는 손가락질 받을 뚜렷한 친일행적도, 친일 시 한편 쓰지 아니한 시인을 왜 친일문학가라고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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