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희 교수 '팔사품 연구'…황제 하사품 아니다. 보물 가치는 이미 충분
오는 19일 통영 세미나, 도독인…자간, 馬·長 글자, 손잡이모양 관인과 차이
中 류바오취안,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 가족에게 선물

통영 충렬사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엄을 상징하는 보물 제440호 '팔사품(八賜品)'.
 
그 유래는 지난 400여 년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충렬사 팔사품은 도독인(都督印)·영패(令牌) 등 여덟 가지 물건을 가리킨다.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날 즈음 명(明)의 황제 신종(神宗)이 이순신의 무공을 치하하며 명의 도독(군통수권자)으로 임명하기 위해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조선·명의 실록에 신종이 직접 내렸다는 내용이 없는 탓에 조선에 파견된 명의 장수 진린(陳璘·1543~1607)이 이순신에게 준 선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400년 묵은 미스터리를 중국 전각 전문가의 도움과 유물 고증을 통해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가 황제가 내린 하사품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 팔사품은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인가? 아니면 진린 도독이 이순신에게 준 선물인가?
 
이를 입증하기 위한 세미나가 오는 19일 오후 2시 통영시립박물관에서 장경희 교수 주제 발표로 열린다.
 
장 교수는 최근 논문 '팔사품 연구'를 통해서 이 같은 주장을 펼치고, 중앙일보에서 11월 7일자로 '이순신 팔사품,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 아니다'는 기사로 집중 다루고 있다.
 
통영 역시 그 유래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장 교수가 통영시에 제안한 세미나를 오는 19일 개최, 역사적 사실이 어떤 것인지 검증하는 자리를 가진다.
 
팔사품이 명나라 황제의 하사품이 아니라는 주장은 지난 2012년 중국 류바오취안 산둥대 교수가 먼저 제기했다.
 
中 류바오취안, 진린 도독, 이순신 장군 선물한 것
-2012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제심포지엄


중국 산둥대 한국학원 류바오취안(劉寶全) 교수는 2012년 8월 23, 24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열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사업단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 논문 '중국문헌으로 본 임진왜란'에서 '팔사품'은 진린이 이순신의 가족에게 남긴 선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충렬사 팔사품은 흔히 '명조 팔사품'으로 불리며, 충렬사에는 '명의 수군도독 진린 장군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명황제에게 보고하자 명의 신종(神宗)이 그 전공을 치하하여 보내준 포상물'이라는 설명과 함께 총 8품15점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그는 ▲팔사품에 대해 진린이 명나라 신종 황제에게 건의해 이순신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했지만 한·중 양국의 역사문헌들에서는 이와 같은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
 
▲또 명 신종실록(明神宗實錄)에는 '조선의 신하 이순신에게 표창하도록 하라'고 기록됐지만 명나라 조정은 그 어떤 포상도 내리지 않았다.
 
류 교수는 ▲이순신이 진린과 사이가 각별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팔사품을 진린이 남겼을 것으로 파악했다.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신흠(1566∼1628)의 문집인 '상촌고(象村稿)'에는 진린의 조문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이에 따르면 '(진린) 도독은 통곡하며 부의하기를 매우 두텁게 하였다. 들어가 영구(靈柩)에 곡하고는 그 처자들을 조문하고 떠났다'고 돼 있다.
 
진린(1543∼1607)은 중국 광동성 출신으로, 임진왜란 등 참전의 공을 인정받아 귀국 후 주요 직책에 중용됐다. 하지만 명이 청에 의해 망하자 손자 진영소(陳泳素)는 배를 타고 남해 장승포로 망명 정착, 현재 광동진(陳)씨의 한국 시조가 됐다.
 
장경희 교수…팔사품 도독인, 공식 인장 아니다
-자간, 관인에 안쓰는 글자 馬·長 사용, 손잡이 차이
-하사품 아니라도 이순신 상징물품, 보물가치는 충분

 
신종이 이순신을 도독에 임명하려고 도독인을 내렸다는 설은 1650년께 쓰인 김육(金堉·1580~1658·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유학자)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처음 나온다. 이순신의 공적을 칭송하는 내용인데, 출처가 명시돼 있지 않다. 이후 이순신 관련 책들이 이를 인용하면서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중앙일보 11월 7일 기사에 따르면 장경희 교수는 도독인에 새겨진 글자를 중국 학자와 함께 분석한 결과 명의 공식 인장에는 없는 특징이 다수 발견됐다고 한다.
 
중국고적문화연구소 쑨창옌(孫菖延) 연구원 등 중국 전각 전문가들은 "공식 인장인 관인(官印)은 글자 사이의 분할이 명확한 반면 팔사품 도독인은 글자 구분이 힘들다. 또 관인에 쓰이지 않는 '馬' '長' 등의 글자가 있는 것으로 봐 개인적으로 판 사인(私印)이 확실하다"고 분석했다.
 
도독인의 손잡이는 넓적한 데다 끝 부분이 둥글지만, 명대 관인은 모두 손잡이가 막대형이라는 것도 다른 점이다.
 
장 교수는 "황제가 하사한 것이 아니더라도 이순신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오랜 기간 숭상돼 왔으므로 보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장 교수, 후대 만들어진 유물도 있다
-영패주머니, 1861년 신관호 통제사 제작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후대 추정

 
장 교수에 의해 팔사품 중 일부는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이 아니라 이후 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처음 밝혀졌다.
 
영패를 넣는 주머니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안쪽에 쓰인 글씨가 발견된 것이다.
 
제작 시기와 제작자를 표시하는 '辛酉三月日(신유삼월일·신유년 3월 어느 날)' '申等新備(신등신비·신관호 등이 새로 갖춤)'라는 글자가 먹으로 써 있었다. 신유년은 1861년이고 신관호(申觀浩)가 187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했던 때다.
 
장 교수는 "영패는 당대의 유물이지만, 이를 넣는 주머니는 이후 새로 갖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정조 때인 1795년에 편찬한 『이충무공전서』의 기록과 현재 남겨진 독전기(督戰旗)·홍소령기(紅小令旗)·남소령기(藍小令旗)의 형태가 달라 이 역시 후대에 갖춘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이다.
 
문화재청, 팔사품 크기 잘못 기록
-도독인·영패·귀도(鬼刀)·참도(斬刀)

 
장 교수에 의해 팔사품의 실제 크기가 문화재청의 공식 기록과 다르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문화재청이 작성한 '보물지정서' 등 공식 기록에서 도독인 길이와 폭은 각각 15.1㎝, 7.8㎝다. 하지만 장 교수가 세 차례 실측한 결과 길이·폭은 10㎝, 5.6㎝였다.
 
영패·귀도(鬼刀)·참도(斬刀) 등 다른 유물의 크기는 최대 1m까지 차이 났다.
 
문화재청은 보물 지정 당시인 1966년 이후 2001년 보존 처리를 위해, 2011년 정기 조사에서 팔사품 실물을 확인했지만 수치를 수정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관리 주체인 문화재청이 보물의 실제 크기를 반세기 동안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같은 내용이 발표되자 사실 확인후 수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장 교수의 논문은 오는 30일 발행하는 학술지 '역사민속학' 46호에 실릴 예정이고, 그보다 앞서 오는 19일 오후 2시 장 교수의 제안에 따라 통영시립박물관에서 세미나가 열린다.
 
통영시 문화예술과 관계자는 "통영 충렬사 팔사품, 명조 팔사품이라 불리는 보물 440호에 대해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이미 2012년 중국 학자에 의해 제기돼 왔고, 이번에 장경희 교수가 논문과 중앙일보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역사적 진실이 어느 것인지 정확히 알고 싶어 장 교수의 세미나 제안을 수용했다. 다양한 연구가 진행, 사실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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