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비한 나가타 기와집 생선무역과 발동기선, 오카야마촌의 경제적 부 상징
일본 신앙의 신사, 조선에 뿌리를 내리고자 한 학교…이제 역사를 증언한다

 100여 년 전 오카야마촌이라 불리던 작은 발개마을(남포)의 현재의 모습. 2014년 4월 최명만 사진작가가 항공 촬영한 것이다. 가운데가 남포의 모습이고 오른쪽 산 너머 구릉을 타고 있는 집들이 그 당시 조선인들이 살았던 큰 발개마을이다. 음악당과 금호충무마리나 리조트가 보이고 있다. 큰길을 타고 왼쪽으로 도는 맨끝이 유람선여객선 터미널이다. 오카야마촌 시절 이후 해원양성소가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다. 그 끝을 타고 뾰족 튀어나온 부분이 통개도로 일본 신사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관광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다.
즐비한 기와집과 정제된 도로, 그리고 생선무역과 발동기선은 그 당시 오카야마촌의 경제적 부를 드러낸 표상이었다.
 
동쪽으로 트인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 통개도에 건립된 신사(神社)와 영장(靈場)은 일본 이주민들의 신앙의 중심지이자 이곳을 상징하는 또 다른 표지였다.
 
그렇다면 오카야마촌 이주가 시작된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은 어떠할까?
 
철저한 계획 도시 오카야마의 현재는 통영시 도남동 남포마을(일명 작은 발개마을)로 남아있다.
 
그 당시 조선 현지인들이 살았던 큰 발개마을은 통영국제음악당과 금호마리나리조트가 들어서 격조높은 음악과 관광 1번지로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당시 조선인들이 바로 옆 일본인 집단이주지인 오카야마촌과 철저히 분리, 차별 당했듯이 지금 관광 개발이라는 목적 아래 생존의 터전을 잃지 않기 위한 투쟁 현수막이 여기저기 나붙어 있다.
 
반면, 바로 옆 오카야마촌으로 불리던 작은발개 마을은 미륵산케이블카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여객선터미널에서는 통영섬을 관광하기 위해 주말마다 주차장이 가득차고, 큰길을 따라 흐르는 해안선에는 하루 하루 건물이 높아지고 식당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잠깐 눈을 돌려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자.
 
'민박' '담배' '슈퍼'라는 팻말이 곳곳에 붙어있는 작은발개 마을 안 골목은 나지막한 일본식 기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곳곳에 우물과 점방이 산재, 1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을 한눈에도 알 수 있다.
▲ 남포초교 옥상쪽에서 내려다 본 모습들. 나카야 장옥 지붕이 아직도 즐비하다.
 
100여 년 오카야마촌, 곳곳 흔적 산재
장옥 2열 직렬 배치, 감독관 집 선두

최근 '일제강점기 일본인 이주어촌의 흔적과 기억: 통영 오카야마촌을 중심으로' 논문을 발표한 박정석 목표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오카야마촌에는 오카야마현 와케군(和氣郡) 이리촌(伊里村) 출신자가 중심 세력을 형성했다고 말한다.
 
이는 통영 도남리의 지형과 어장조건이 이리촌과 유사한 까닭이다.
 
이리촌의 앞바다는 수심이 얕고 갯펄이 많아 붕장어나 갯장어 어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이 많았다. 오카야마촌에도 이리촌 출신 어민들이 갯장어, 붕장어, 도미 등을 대상으로 연승이나 삼치 유뢰망을 주로 사용했다. 빈촌이었던 이리촌에서 이주에 응했던 사람들은 어민들 중에서도 궁핍한 사람들이었다.
 
이 오카야마촌은 동쪽으로는 해안선이 바다로 열려 있지만 남쪽은 육지가 바다로 돌출, 파도의 바람을 막아주는 구조이다.
 
북쪽으로는 통개도라는 무인도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정착지와 무인도를 연결하는 방파제를 건설, 어선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또 마을 앞의 해안선을 매립, 주택과 각종 시설물을 건립할 수 있는 대지를 마련했다. 마을 뒷산의 수원지를 개발 음용수로 사용하고, 거주지 곳곳에 우물을 마련, 평상시에 사용할 수 있는 물을 확보했다.
▲ 오카야마촌 심상소학교 - 현 남포초교
 
특히 오카야마촌 심상소학교(현 남포초교 전신)는 조선에 뿌리를 내리고 이곳에서 안정된 생활을 도모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자 실질적인 매개체였다.
 
일본인들은 해안선을 따라 주거가옥을 건설했다. 가옥은 일본식 장옥 형태로 건립됐다. 장옥은 2열로 구성됐으며 직렬형으로 배치됐다. 장옥과 장옥 사이에는 골목을 두어 이동을 편리하게 했다.
 
감독관이 거주하는 가옥(남포슈퍼 앞 도남교회 자리, 지금은 멸치 건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은 직렬로 이루어진 가옥군 바로 앞에 두어 주민들의 관리와 감독을 용이하도록 배치했다.
 
가옥군 중간에는 상점(현 남포슈퍼)이 있었고, 가옥군의 남쪽 끝에는 선박을 수리하거나 건조할 수 있는 조선소(현 통영육아원)가 들어섰다.
▲ 오카야마촌 조선소 - 현 통영육아원
 
▲ 우체국(현 동원해물천국)과 간장공장(영빈관~다도해식당)이 나란히 존재했다. 건물 뒷편에 우체국장 사택이 그대로 남아있다.
 
학교와 우체국(현 동원해물천국)은 조선소 옆에 있었지만, 학교는 나중에 지금의 남포초교 자리로 이전하고 우체국은 마을의 북쪽 들머리에 우체국장의 사택(현 동원해물천국 바로 뒤 2층 기와집)과 함께 별도로 건립됐다.
 
지역의 중심지이자 교통의 거점인 통영읍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주어촌 초기에는 바닷길이었지만 후기에는 해저터널이 개통되면서 육상으로 연결됐다.
 
오카야마촌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설을 계획적으로 만들고 배치했다. 장소로서의 이 마을은 공동체라는 개념이 반영되었고, 이들은 관리의 대상이기도 했다.
 
주민들을 직선으로 배치된 장옥에 가족단위로 거주시킴으로써 조직적인 통제가 가능토록 했다.
 
관리자의 가옥은 2열로 배치된 장옥의 전면, 즉 바다에서 마을로 드나드는 마을의 중앙에 두어 실질적인 관리 기능과 더불어 상징적으로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마을 배치에 대한 기록은 작은 발개마을 원로들의 증언은 물론 김세윤 전 통영문화원장의 구술, 박형균 통영사연구회 전 회장이 제공한 오카야마를 비롯 통영에 이주해왔다 살아 돌아간 통영회 회원들의 기록들에도 상세히 나온다.
 
통영사연구회 박형균 전 회장이 이번 기획을 통해 세상에 첫 공개한 통영읍견취도는 2002년 4월 22일 일본 통영회 구주대회 기념으로 통영회 회원들이 초판을 발행한 것이다.
▲ 통영사연구회 박형균 전 회장이 이번 기획을 통해 세상에 첫 공개한 통영읍견취도는 2002년 4월 22일 통영회 구주대회 기념으로 통영회 회원들이 초판을 발행한 것이다. 오카야마촌 지도에는 조선소와 학교, 간장공장, 광장, 창고, 사무소, 밭, 묘지, 선착장, 신사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 지도에는 오카야마촌 조선소와 학교, 간장공장, 광장, 창고, 사무소, 밭, 묘지, 선착장, 신사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즐비한 기와집이나 정제된 도로의 규모가 島(섬)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어촌입니다만은 구십여호나 되는 이곳에는 조선 사람의 집이 사십호 미만입니다. 일본사람 중에도 岡山縣(강산현·오카야마현) 사람이 많이 사는 까닭에 이 이름을 어든 것이라나요?
 
생선貿易(무역)차로 모인 發動機船(발동기선)이 앞바다를 덮었는데 물 가운데로 돌출한 언덕에는 神社(신사)가 있고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하여 激浪(격랑)의 꿈틀거리는 斷崖(단애·절벽 같은 바위) 사이에 指月橋(지월교)라는 다리가 가설되어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8년 7월 4일 기사 중>

▲ 30년간 오카야마촌을 건립한 하타켄안. 김일룡 통영문화원장 소장본
30년간 오카야마촌 경영자 하타켄안(波田兼晏)
1925년 마을 100만엔 수입, 호당 1만엔 이상…도남교회 하타의 집, 송덕비 2회 매몰 수난
이처럼 어마어마한 통영 속 일본 건설에 나선 책임자는 처음에 일본 오카야마현 출신의 오카에모(江某)였다. 하지만 해산(海産)회사와 결탁, 폭정이 난무했고, 오카야마촌에는 술집 등이 즐비했다.
 
결국 파면됐다. 1910년 새 관리자 하타켄안(波田兼晏)이 부임했다. 그 해 4월부터 약 30년간 오카야마촌을 경영한 감독자인 하타는 야마구치현(山口縣) 출신으로 촌 경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일본 수산인재 양성을 위한 최초 교육기관인 농상무성 수산강습소의 3회 졸업생으로 대만총독부를 거쳐 야마구치현에서 근무하다가 오카야마촌 관리자로 부임, 마을에 상주하며 이주어민 감독, 어업관련 직무 등을 포함 마을 경영 전반을 책임지고 운영했다.
 
이 오카야마촌은 1925년 당시 수송선 5척, 판매고 50만엔으로 연 수입은 100만엔에 도달했다. 1호 평균 수입이 1만엔을 넘을 정도로 부촌으로 발전했다.
 
하타의 집은 현재 장옥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골목 한 가운데 도남교회로 불리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작은발개 마을 안태봉인 최복선(79)씨는 "해방될 때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이었다. 우리는 이 집을 하타 영감집이라 불렀다. 왜정시대 부자영감이고 이 마을 책임자로 알고 있다. 통개도 신사 입구에 송덕비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 해방 후 송덕비가 마을앞 갯벌에 묻혔다가 대규모 매립이 진행된 1980년대 도남동 관광단지 개발사업현장에서 발굴, 다시 관광단지 주차장에 묻혔다.
2차례 매몰을 당한 하타켄안 송덕비. 김일룡 통영문화원장 소장본
통개도 신사입구에는 신사의 출입문 토리이와 함께 오카야마 감독관 하타켄안의 송덕비가 있었다. 해방후 마을 앞 갯벌이 묻혔다가 1980년대 도남동 관광단지 개발사업으로 갯벌이 매립됐다 발굴됐다. 다시 관광단지 내 주차장 아래 파묻혔다.
 
박형균 통영사연구회 전 회장은 "하타켄안 감독관이 주먹잡이였다 승려였다 말들이 분분했다. 하지만 일본 이주민과 조선 현지민들을 융합시키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남포어업조합 역시 그런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오카야마촌 형성의 결정적 역할자임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일제하 통영의 일본인 이주어촌 형성과 경제활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경남대 대학원 김예슬 석사는 "오카야마촌의 관리자인 하타가 조합을 형성한 목적은 어업활성화도 있지만, 각기 다른 습관을 가진 이주민들을 이를 통해 융화하고자 설립했다. 남포어업조합은 일본인 뿐 아니라 조선인까지 포함된 한일합동어업조합의 효시이다. 하지만 일본인 독점 체제로 운영됐다"고 설명했다.
 
하타켄안 인물 사진과 지금도 땅 속에서 잠자고 있는 송덕비 사진은 김일룡 통영문화원장이 제공, 그 당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일본이주민 신앙 중심지 신사(神社)
벚꽃거리 데이트, 소풍 장소 인기

즐비와 기와집과 정제된 도로, 그리고 생선무역과 발동기선이 오카야마촌의 경제적 부를 드러낸 표상이라면, 오카야마촌 신사는 일본인 이주민들의 신앙의 중심지이자 이곳을 상징하는 표지였다.

박정석 목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와 이영준 통영시립박물관장은 "통영시내 중심가에 있던 통영신사(統營神社·도에이 진자)가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모셨다면, 오카야마촌 신사는 해신(海神·곤비라)이 천조대신과 같이 안치됐다"고 한다.
 
신사가 있는 통개도는 두 개의 봉우리가 있어 위쪽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바닥은 연결돼 있었다.
사가 들어선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면서도 신사가 들어선 장소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였다.

▲ 신사 앞 박견이 관음암 정문에 이설, 불교 의장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밖에서 보는 쪽에서 왼쪽 박견은 입을 다물고 있고, 오른쪽 박견은 입을 쩍 벌리고 나란히 서 있다.
 
신사에 들리는 사람들은 토리이(鳥居)가 설치된 돌계단으로 올라가 참배를 마친 다음 다리로 연결된 반대쪽으로 내려오게 설계 됐었다.
 
현재 이곳은 관광객을 위한 전망대로 꾸며져 있다. 돌계단은 나무계단으로, 신사가 있었던 곳은 전망대가 들어서 있다. 지금의 전망대 구조는 신사 구조를 훼손하지 않은 거의 그대로의 구조이다.
 
이영준 통영시립박물관장은 "어린 시절 통개도에 가면 신사가 있었다. 입구인 토리이를 지나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신사를 지키는 영물(靈物) 박견( 犬)이 한 쌍 있었고, 전 충렬여상 자리에 있었던 통영신사 보다는 작은 규모의 신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 선생이 앞장서 매주 신사참배를 하는 것이 소학교의 주요한 일과였다"고 회고했다.
 
▲ 일본 이주민들의 정신적 표상이었던 오카야마촌 신사는 사라지고 현재 도남관광지 전망대(오른쪽)로 활용되고 있다. 신사 이전에는 조선조 경상전라충청 삼도수군통제영 시절 정찬술 통제사가 통개도로 이름지어 불러 그 글씨가 바위에 그대로 남아있다. 왼쪽은 일본 통영회 나카다슈유호(통영사연구회 회원)씨가 찍은 1930년대 바다에서 찍은 신사 전경. 사진 제공 통영사연구회 박형균 전 회장.
▲ 현재 통개도 입구에 서 있는 유래 설명판

박형균 전 통영사연구회장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토리이 주변으로 해서 일본벚꽃나무들이 신사 주변에 즐비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학생 소풍 장소로도 인기가 있었고, 연인들 데이트 코스로도 인기가 있었다. 통영거주 일본이주민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만든 모임인 통영회의 문집 '한려'를 보면 이 신사와 벚꽃나무거리(오카야마무라 사쿠라마찌)를 회상하면서 지은 작품이 남아있다"고 자료를 제시했다.
 
김일룡 통영문화원장은 "오카야마촌 신사를 통제사 활시위와 연관이 있는 통개도에 설치한 것은 통개도의 섬으로써의 비경과 신비함도 있지만 통영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일환이기도 하다고 본다. 신사 내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거의 보기 힘들다. 신성시 됐고 은밀하게 가려져 있기도 했다"고 말했다.
 
작은발개 주민 최복선씨는 "대여섯살 때 보면 지금 남포초교인 오카야마 심상소학교에는 일본인들만 다녔고, 매주 월요일 아침, 공부 시작 전에 줄을 지어 신사 참배하러 가는 모습이 일상이었다. 호기심 어린 마음에 따라가 보면 일본 전통 복식 기모노를 입은 승려 같은 사람과 교사의 지시에 따라 신사 참배를 하고 박수를 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내가 진남국민학교 입학하고 해방될 때까지 신사참배는 계속됐다"고 증언했다.
 
다양한 증언처럼 신사 건물과 상징물은 철거돼 현재 사라진 상태이다. 해방 이후 멸치어장막 고사 장소로 사용되다가 그 주변이 어린이놀이터로 변모했다가 현재는 요트협회가 운영하는 요트학교 요트가 전시돼 있는 장소다.
 
신사 앞 박견은 해방이후 통영시 미륵산 관음암으로 옮겨져 관음암 돌계단 정문 양쪽에 서 있다. 한국 불교 사찰의 상징물로 기복 전환된 박견 중 한쪽 개는 입을 다물고, 또 다른 쪽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기사에 도움 주신 분
박형균 전 통영사연구회장
나카다슈유호(中田修輔) 일본 히로시마공립중 전 교장(통영중 제1회 졸업생)
이영준 통영시립박물관장
김세윤 전 통영문화원장
김일룡 통영문화원장
김상환 경상대 사학과 교수
박정석 목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이지우 경남대 사학과 교수
김예슬 경남대 한국사 석사
작은 발개마을 최복선, 박천담씨
영빈관 대표 김미선 한산신문 시민기자
최명만 사진작가
김순효 한산신문 독자자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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