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에 걸친 3천7백여 장꾼, 지식인, 학생, 기생 합심 '통영만세운동'
3월 1일 10시30분 강구안 문화마당 3.1절 기념행사 및 만세 재현

 
 
"철석같은 우리의 신념, 벽력같은 우리의 함성, 적의 창과 투구는 이미 땅에 떨어졌나니, 소양한 천지, 구십춘광 거칠 것, 막힐 것 없는 정의의 개선, 회천동지(回天動地)의 나팔이다. 강산을 뒤흔드는 함성, 아침 해 칠색영채에서 오려 온 韓(한) 나라 簇竿(족간), 이천만의 손으로 매어울리렴, 하늘 높이 靑天(청천)까지…나라 생각 외에 일절 구구한 욕심은 도적질이다. 우리에게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다오." <진평원의 동포에 격하노라! 중에서>
 
올해는 우리가 광복을 맞은 지 7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이다.
 
일제강점기 그 힘든 터널을 건널 수 있었던 광복의 시발점은 이미 1919년 3월 만세운동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숨 건 통영 만세운동의 출발은 1919년 3월 8일 경성 배재고에 재학 중인 진평헌이 귀향, 3월 13일 장날을 기해 진평원, 권남선, 양재원 등 19명의 청년들이 거사를 결의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일본인의 밀고로 10일 새벽 일본 경찰에 발각, 주모자 모두 체포, 투옥된다.
 
그러나 당시 하와이로 망명, 미주국민회 간사로 있던 고채주(당시 59세)가 밀입국, 20일 후인 4월 2일 현 통영시 중앙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켜 3천여 장꾼들과 합세,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사건으로 일경에 붙들린 주모자 3명이 대구부산형무소에서 1년∼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이들 가운데 이학이(당시 22세), 허장완(당시 21세) 등 세 열사가 옥중에서도 독립정신을 굽히지 않아, 심한 고문에 의해 옥사하거나 가석방돼 나와 숨졌다.
 
이학이 열사는 6개월의 형기를 채우지 못하고 그 해 9월 부산형무소 부설병원에서 사망, 부산의 최천택 등 청년들에 의해 객선으로 통영으로 운구돼 8일장을 치렀는데, 장례기간 동안 곳곳에서 군중들이 만세를 불러 죽음 이후에도 민족혼을 일깨웠다.
 
또 6개월형을 받은 허장완은 부산감옥에서 마산형무소로 이감, 모진 고문으로 그해 10월 9일 옥사했다.
 
허 열사의 시신은 마산청년단들이 배둔까지 운구하고, 배둔청년들은 고성까지, 고성청년들은 다시 통영까지 운구하는 등 시신을 옮겨 왔으며 운구를 하는 길목마다 주민들이 일경의 삼엄한 경비 아래에서도 민족혼을 과시했다.
 
또 고채주씨는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중병으로 가석방, 통영면 도남리(현 도남동)에 돌아와 1920년 6월 21일 60세의 나이로 세월을 떠났다.
 
그는 40세의 나이로 하와이로 망명, 마카월린 농장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1906년 교포들을 모아 자강회를 조직했고, 1908년에는 한인합성협회와 전미주한인공립협회를 통합, 국민회를 창설하는 등 해외독립운동의 큰 기둥이었으며, 고향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4월 2일 시위에는 예기조합의 기생 33명도 금비녀와 팔찌를 팔아 소복차림으로 시위대열에 동참했다는 감동적인 기록도 있다.
 
당시 통영은 지금과 다름없이 남해안의 어업 전진기지였다.
 
1899년부터 일본 어업민의 이주로 집단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통영 어시장의 해산물 가공, 생산, 유통을 장악, 지역 어민과 상인을 수탈해 왔기에 반일감정이 크게 고조돼 있었다.
 
 
통영의 시위는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총 9회 3천700여 명의 지식인, 청년 학생들이 주축이 돼 차츰 각계각층 시민들이 참여했다.
 
대부분 장날을 이용, 통영 읍민과 인근 농어민들까지 동참, 시위 규모가 확대돼 당시 통영시민들의 독립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현재 원문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3.1운동 기념비는 통영인으로서 3.1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희생을 당한 애국지사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1972년 9월 충무 시민의 이름으로 남망산 광장에 세웠다가 1991년 원문공원으로 이설,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매년 3월 1일 원문공원 3.1운동 기념탑 앞에서 3.1동지회 유족과 공무원 위주로 통영만세운동 기념행사를 간소하게 치러오다 2012년부터 격을 높여 강구안 문화마당에서 시민 동참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광복 70주년, 3.1절 96주년 기념 통영의 3.1절 기념행사는 3.1동지회와 통영시가 준비한다.
 
통영만세운동을 재조명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순국하신 선열들의 위업을 계승 발전시기기기 위한 이번 행사는 3월 1일 오전 10시 정각 용남면 원문공원 3.1운동 기념비에서 헌화와 묵념으로 시작한다.
 
이어 통영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인 강구안 문화마당으로 자리를 옮겨 10시 30분 기념행사를 펼친다.
 
허만기 3.1동지회 회장을 비롯 독립유공자 유족, 관내 보훈단체장 및 기관단체장 등 시민 1천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남해안별신굿보존회의 진혼굿을 시작으로 경과보고, 김동진 통영시장 기념사, 허만기 3.1동지회장 추모사, 삼일절 노래제창, 강혜원 통영시의회의장 만세삼창, 시가행진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허만기 3.1동지회 회장은 "임이시여! 봄은 왔지만 우리의 가슴 속 차가운 바람은 쌩쌩 불고 있습니다. 조국을 위해 웃으며 대문을 나섰던 우리 학이, 장완 열사들, 흰 상복을 입은 우리의 언니들…모두가 통영의 주역들입니다. 우리가 그 정신을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여자가 본부를 찾아 섬기려는 것이오"

제96주년 3.1절, 일제강점기 통영 여성항일운동 재조명 활발
33명 기생 금비녀·금반지 팔아 독립운동, 3천여 관중과 만세

제96주년 3.1절을 맞아 1919년 당시 기생 신분으로 통영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최근 일제강점기 여성 항일 운동이 전국적으로 재조명 되는 가운데 통영의 기생들이 금비녀와 금반지를 팔아 자금을 마련, 3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펼친 것은 역사적으로도 학계 주목을 받고 있다.
 
통영에서 기생들이 단체를 만들어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실은 독립만세운동에 나선 혐의(보안법위반)로 실형을 선고받은 기생 정홍도(본명 정막래, 당시 21세)씨와 이국희(본명 이소선, 당시 20세)씨에 대한 일제 재판부의 1919년 4월 18일자 판결문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정씨와 이씨는 1919년 4월2일 오전 10시께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기생조합소에서 다른 기생 5명을 불러모아 자신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 함께 '기생단'을 조직했다.
 
정씨 등은 자신들의 금비녀와 금반지를 담보로 돈을 마련, 상장용(喪章用 장례식용) 머리핀과 초혜(草鞋 짚신), 광목 4필반을 구입, 이들에게 나눠준 뒤 같은 모양의 옷을 입고 같은 날 오후 3시30분께 통영군내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들 7명을 선두로 33명의 기생이 뒤따랐고 당시 통영경찰서 앞에서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합세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판결문에는 "피고 두 명은 경찰관의 제지에 따르지 않고 선두에서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과 함께 시위운동을 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담당판사는 판결문에서 '기생단 7명이 열광적인 기세로 군중의 최선두에 서서 만세를 외쳤다'는 경찰의 보고서와 진술 등을 언급했다.
 
기생들은 판사와의 대화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통영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통영시지(統營市志)는 법정에 선 기생과 조선총독부 판사의 대화를 전하고 있다.
 
"나는 여성으로서 본부(本夫)와 간부(姦夫)가 있는데 어느 남편을 받들어 섬겨야 여자의 도리에 합당하겠습니까?"
 
"물론 본부를 섬겨야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여자가 본부를 찾아 섬기려는 것이오."
 
통영시지에는 기생 이씨의 이 같은 대답에 "판사는 답변을 못하고 곧 퇴정하였다 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정홍도와 이국희 등은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국가는 재판 기록문을 근거로 지난 2008년 이 두 사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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