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과연 국민가요라 할만하다. 이 노래를 들으면 '부산항', '동백섬', '오륙도', '갈매기', '형제' 등의 토속지명과 그 노랫말에 이끌려 누구나 바다 냄새 물씬 풍기는 남녘 항구도시로의 여행을 꿈꾸게 된다. 강렬한 비트사운드로 시작되는 음의 전개 또한 당시 수준으로는 아주 혁신적인 트로트였다.
 
발매 직후인 1974년 남북공동성명으로 조성된 남북 화해 무드를 타기 시작하여, 1976년에 러시를 이룬 조총련 재일동포의 모국방문 시점과 묘하게 맞물려 더욱 흥행가도를 달렸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말까지 당시의 가수라면 누구나 이 노래의 취입을 원했다. 그리고 우리 가요 역사상 가장 많은 가수들이 부른 노래가 되었다.
 
결국 이 노래는 지난 세월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요' 설문에서 압도적 1위에 올랐으며, 무명가수 조용필을 국민가수로 자리 매김시켰다. 1995년 연합통신이 광복 50주년을 맞아 '반세기 한국사회를 움직인 대표인물 50명'을 선정했을 때에도 가수로는 유일하게 그가 포함됐을 정도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가요가 되기까지의 우여곡절과 그 슬픈 사연을 아는 이는 세간에 그리 많지 않은 듯싶다.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돌아와요 부산항'이 아닌 '돌아와요 충무항'이었다. 충무(통영) 출신의 김성술(예명 김해일)은 1967년 고향을 떠나면서 충무항 강구(江口)의 여객선 부두에서 부모님과 눈물 흘리며 작별했던 아픈 경험과 함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직접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노래를 발표한다.
 
1969년 앨범을 준비하던 그는 작곡자 황선우의 곡에 자신의 고향인 충무를 소재로 직접 가사를 써넣었으며, 1970년 12월 16일 앨범을 발매했다. 유니버어살레코드사가 33과 3분의 1, LP판으로 제작한 이 앨범에는 김국환의 '너는 사랑의 나그네'와 '발길 돌리는 여인'을 비롯하여, 김성술이 김해일이라는 예명으로 '떠나간 당신'과 '돌아와요 충무항에' 등의 4곡을 더하여 모두 12곡이 수록되었다.
 
'돌아와요 충무항에'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제작된 이 음반의 B면 두 번째 트랙에 실렸다. 노랫말은 마치 이태리의 나폴리 칸소네 '돌아오라 쏘렌토로'를 연상시키는 듯 떠나간 님이 아름다운 충무항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애절함을 담고 있다.
 
'돌아와요 충무항에'(김성술 작사, 황선우 작곡, 김해일 노래)
1. 꽃피는 미륵산엔 봄이 왔건만/ 님 떠난 충무항은 갈매기만 슬피 우네/ 세병관 둥근기둥 기대여 서서/ 목메어 불러 봐도 소식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 2. 무학새 슬피 우는 한산도 달밤에/ 통통배 줄을 지어 웃음꽃에 잘도 가네/ 무정한 부산 배는 님 실어 가고/ 소리쳐 불러 봐도 간곳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
 
하지만 이 앨범에서 '돌아와요 충무항에'는 크게 주목받지를 못했다. 그리고 음반 발표 후 그는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군에 입대하였으며, 이듬해 불행하게도 휴가를 나왔다가 대연각 호텔 화재로 26세의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대연각 호텔은 서울 충무로에 있던 23층의 건물로, 1971년 12월 25일 성탄절 오전에 2층의 커피숍에서 프로판 가스폭발로 발생한 화재가 급격히 확산되어 2시간 만에 최고층까지 불길에 휩싸여 아비규환의 재난현장이 되었다. 사망자 166명이라는 최악의 화재 사고였다. 당시 슬픔에 잠긴 그의 유가족은 음반을 전부 회수하여 불살랐으며, 그로부터 이 음반의 존재 또한 아주 잊혀졌다.
 
그리고 그의 사망 후 이 노래는 일부 개사되고 반 박자 빠르게 수정되어 1976년 재일동포 고향방문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시점에 현재 우리가 듣고 있는 가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로 완성되었다. 국민가요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황선우 작사 작곡, 조용필 노래)
1.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엔 갈매기만 슬피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2.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해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그러자 2004년 6월 3일, 김해일의 어머니 강(姜)씨는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작사 및 작곡자 황선우 씨를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원곡인 '돌아와요 충무항에'의 가사를 김해일 씨가 썼는데, 이를 일부 수정하여 황선우 씨가 사용하였기에 가사를 표절했다는 소송이었다. 1억 7800만원의 손해배상과 3개 일간지에 해명광고를 낼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서울 서부지부 민사12부 재판부는 "피고 황 씨는 가수 김 씨가 작사한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노래의 곡을 붙이면서 알게 된 가사를 이용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작사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돌아와요 충무항에'가 이별한 연인을 그리는 내용이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형제를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창작성이 더해졌고, 가수 김 씨가 음반 발표 후 별다른 활동이 없었던 점을 참작해 3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즉 원고에게 3천만 원을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린 것이다.
 
한때 부산 해운대의 동백섬에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비를 세울 계획이 추진된 일이 있었다. 이에 가수 조 씨가 정중히 사양한 걸로 알려졌다. 아마도 노래 '돌아와요 충무항에'와 관련한 비화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명 '충무(忠武)'는 1955년 이 고장 통영군의 통영읍(統營邑)이 충무시로 승격되면서 불리기 시작하여, 1995년 통영군과 충무시가 도농복합도시로 통합되어 '통영시(統營市)'로 칭하기까지 약 40년간 불린 오늘날 통영시의 구시가지 동지역을 칭한 도시명이다. 이러한 '충무' 지명은 과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펼친 '국풍81'로 유명해진 '충무김밥'으로도 잘 남아 있다. '충무'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고 있는 통영의 가장 추억어린 대표적인 옛 지명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필자는 이러한 사연이 담긴 고 김성술 씨의 '돌아와요 충무항에' LP판을 어렵사리 구하여 지난 10여 년간 '통영시 향토역사관'에 전시하며 관람객에 들려주기도 했었다.
 
이제, 국민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본향인 옛 충무항의 부두였던 지금의 통영 문화마당 한 곁에 조용필이 아닌 충무(통영) 출신의 가수 김성술(예명 김해일)의 '돌아와요 충무항'을 기리는 작은 노래비를 하나 세우기를 제안한다. 여기를 지나는 길손이 작은 버튼 하나 눌리면 님이 떠난 옛 충무항의 정취를 그리워하는 애잔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그런 작은 노래비 하나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만약, 노래비를 세우겠다하면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가수 김성술과 조용필 관련 유니버살레코드사의 LP판 원판 각각 1점씩을 통영시민에게 흔쾌히 내놓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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