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지방법원, 신아sb 파산 선고 할 듯…노동자 190명 전원 해고로 지역경제 급냉
4차례 매각 시도 불발…세계 10대 조선소서 경영진 부패로 몰락…산업재편 기대

과거 세계 조선소 서열 10위까지 오르며 통영지역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신아sb(옛 신아조선)가 곧 파산할 것으로 보인다.
 
창원지방법원은 신아sb가 지난 23일 법원에 기업 파산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25일 밝혔다. 법원은 기업 청산을 전담할 파산관재인을 지정해 회사 청산에 나선다. 파산관재인은 신아sb가 보유한 자산을 처분해 채권자들에게 분배한다.
 
이번 기업파산신청으로 창원지방법원이 곧 파산을 선고할 것으로 보여 그동안 남아있던 노동자 전원은 해고된다.
 
향토기업 신아sb의 파산소식이 알려지자 통영지역민들은 충격에 쌓였다. 파산이 다른 업종에 까지 미치는 영향과 지역경제에 어떤 위기를 가져올 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역에서 규모가 제일 큰 성동조선해양은 현재 삼성중공업에 위탁 운영되고 있으나 여전히 자금부족을 겪으며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해진에 매각된 21세기조선은 수년째 영업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공장만 있는 조선소가 됐다. 삼호조선을 매입한 한국야나세가 조선소 명맥을 유지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상태이다.
 
국민은행, 신아sb 퇴직예금 69억원 인출제한 논란
신아sb가 파산하면 한때 시민과 노동자가 사들여 종업원 지주회사로 운영되기도 했던 이 조선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신아sb는 현재 노조원 170명 정도를 포함해 190여 명이 근무하고 있으나 실제 출퇴근 노동자는 45명 정도다.
 
신아sb 관계자는 "사직서를 제출해야 퇴직금을 받게 되므로 24일까지 30명 정도가 사직서를 제출했고, 대부분 노동자가 사직서를 제출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신아sb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09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지난해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가 한국무역보험공사와 산업은행 등 채권단에서 M&A를 포함해 수차례 매각 시도를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법원은 지난 12일 회사 회생 계획안을 폐기하자 신아sb는 지난 23일 창원지방법원에 파산 신청서를 제출했다.
 
파산이 결정되면 법원은 파산관재인을 지정하게 된다. 파산관재인은 회사 자산을 처분하고 채권자들에게 분배하는 역할 등을 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국민은행이 신아sb 노동자들 퇴직금으로 사용 예정인 예금 69억 원 인출 제한을 했으나 지난 26일 이를 해제했다. 법원이 파산을 선고하면 이 돈 대부분은 퇴직금으로 사용도리 예정이다. 퇴직금은 파산이 결정된 다음 파산관재인이 주도해서 지급할 예정이다.

신아sb 노조 관계자는 "국민은행은 신아sb 등과 법인회생절차 폐지 확정 결정전에는 지급정지 등을 하지 않기로 확약했었다. 법인회생절차 폐지 결정이 공고되더라도 공고된 다음 날부터 법인회생절차 폐지 결정이 확정되는데, 국민은행은 지난 13일 사전 공지나 동의도 없이 임의로 예금 인출 제한과 상계를 하겠다고 했다. 국민은행은 자신들의 채권만 먼저 챙기겠다는 것"이라고 항의했다.

이에 국민은행 측은 "법정관리 전에 받지 못했던 회생 채권 200억여원과 상계처리 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26일 제한 조치를 해제했다"라고 설명했다.
 
종업원 지주회사로 위기 넘겨 세계 10대 조선소로 성장
신아sb는 1946년 멸치선과 목선을 만드는 최기호조선소로 출발한다. 1973년 박정희 정권 시절 1차 석유 파동 당시 정부의 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회사가 통폐합 대상이 되지만 살아남았다. 정부는 당시 최기호조선에 1억 원을 지원하고 4만 6150평의 공장 부지를 승인했다.
 
1978년 신아조선공업(주)의 주식 10만주는 대우실업이 50%, 대우중공업이 50%를 인수하면서 사실상 대우조선공업에 합병됐다. 1980년대 말 정부는 대기업 등 부실기업 정리를 본격화하면서 신아sb는 시장 매물로 나왔다.
 
회사가 팔리지 않자 노동자와 임직원, 통영 유지들이 200만 원에서 1000만 원씩 각출해 조선소를 인수하면서 신아조선(주)로 출발하게 된다. 신아조선은 이때부터 시민의 회사, 종업원지주회사가 됐다. 조선소 부지와 설비 등에 대한 소유권도 대우그룹에서 넘겨받았으며 1998년에는 회사이름을 신아로 바꿨다.
 
당시 유수언 사장은 "통영 바닷가 자갈밭에서 완전히 빈손으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월급이 나오는데로 회사에 출자하는 등 회사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독립은 했으나 먹고 살 길이 녹록치 않았다.
 
돌파구는 틈새시장 공략이었다. 경쟁력을 낼 수 있는 정유·화학제품 운반선(PC) 건조에 주력했다. PC선은 고부가가치 선박이면서 경쟁력이 치열하지 않은 선박으로 1만~5만DWT급이어서 4만평의 부지에 건조하기 적합한 선박이었다. 이 PC선을 해외에서 본격 수주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독일, 영국 , 이탈리아 등에서 수주선을 뚫었다.
 
이로인해 신아는 1992년 220억 원이던 매출액이 2005년 3,100억 원으로 14배나 급성장했다.
 
2003년 태풍 매미가 남해안을 강타했을 때 신아는 또 한 번의 위기를 겪게 된다.
 
곧 인도해야 될 배가 태풍에 떠내려가 통영대교에 걸렸다. 자재와 설비 대부분이 침수됐다. 처참한 상황에 직면한 직원들은 앞 뒤 안가리고 수습에 나섰다. 야근을 자처하면서 납기일을 맞췄다. 수습 현장을 지켜보던 이탈리아 선주사 감독관은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만든 애사심은 이후 네덜란드 러시아 싱가포르 등으로부터 발주 문의가 꼬리를 물게 됐다.
 
이런 신아조선은 4만~5만t급 중형 탱커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2000년대 중반 수주 잔량 기준 세계 10대 조선소 중 하나로 올랐다.

 

 
조선소 살리기에 지역민 한마음, 결국 수포로
조선소는 2000년대 중반까지 5만t 건조 능력을 갖추며 승승장구했지만 부패한 종업원지주회사 경영진 때문에 좌초 위기에 빠졌다.
 
2006년 정·관계 전방위 로비로 유명한 이국철 전 회장이 신아조선을 인수하면서 SLS조선 시대를 맞았다.
 
SLS조선은 2009년 6억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가 맹위를 떨치던 당시 이 회장은 허위 공시, 조선소 확장과 기업신용등급을 높이고자 뇌물을 건넨 혐의로 기소되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다.
 
2008년 이후 단 1척의 선박도 수주하지 못한 신아sb는 2009년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몇차례의 채무상환 유예를 거치면서 점점 몰락해 갔다. 부실한 조선소를 노동자들과 지역민들이 살리고자 노력했다.
 
정부와 은행, 정치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중소조선소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등 조선소 살리기에 주력했으나 결국 파산 선고를 맞게 됐다.
 
통영중소조선소 살리기에 앞장선 한 관계자는 "채권단에서 신아sb의 인수금으로 1200억원을 일시불로 요구하는 것은 회사를 매각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밖에 안보인다. 모 기업에서 800억원을 주고 차츰 잔금을 처리하겠다고 해도 일시불을 요구하는 것은 기업회생에 의지가 없는 것이다. 정말 힘들게 일해온 근로자들과 지역경제의 한 축을 담당해온 중소조선소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온 분들의 땀의 결실이 희망으로 남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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