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교장님, 신교장님 계십니까” 통영교회(현 충무교회) 전도사이셨던 나의 어머니가 동역자 호주 선교사를 찾으신 말씀이다. 안교장님은 “지금 신교장님은 못 계십니다”두 선교사는 한국말을 서양식 발음으로는 잘 하셨으나 “안 계십니다”를 “못 계십니다”로 표현하신 것이다.호주 장로교 선교부는 통영지구의 선교구권을 맡았고, 이조말기(李朝末期)인 1906년에 한국인들에 의하여 통영교회는 이미 창립되었다. 한일합방(韓日合邦) 당시(1910년)에는 교회신자가 많아져 예배당을 증축할 정도가 되었다. 1918년에는 신애미(미스. M 스커너) 선교사가 통영교회에 파견되어 왔고, 안○○선교사도 합세하였다. 그들은 평생 처녀로 선교사역에 전심하였다. 그들은 조그만 발동선을 사서 통영군에 속했던 한산섬, 사량섬, 욕지섬 기타 여러 작은 섬들에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하셨다고 한다.1918년 1월에 신애미 선교사가 통영교회에 부임하고 그 해 진명유치원을 설립 지금의 문화동 지역 대지 110평에 48평의 예배당을 연다.「한산신문」에 게재된 1931년 3월 19일자 진명유치원 졸업사진은 1918년에 설립된 유치원 13년 후니까 여러 앞선 졸업생이 있었을 것이다.나는 1927년 통영읍 북신동에서 태어나서 4살 때 진명유치원에 입학하여 8살(만6세) 때 통영초등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당시 2만 인구의 어항도시인 통영읍에 한국인 초등학교가 하나밖에 없어 입학하지 못하고 이듬해도 입학하지 못하여, 결국 10살(만8세) 때에야 초등학교에 들어 갈 수 있었다.그러니까 진명유치원을 근 6년간 다닌셈인데 진명유치원 졸업반에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예비반」이 있어 국어와 수학, 그때는 산수라고 하여서 구구단이나 곱셈 나눗셈까지 달달 외울 수 있었다.진명유치원은 안띠산에 터를 닦아(지금 통영초등학교를 쳐다보고 왼쪽) 교실 여러개와 넓은 교정이 있었다.교정 조금 아래에는 호주 선교사의 빨간 벽돌집이 두 개 있었다. 신교장과 안교장의 저택이었다. 유치원에서는 온갖 동요와 유희 기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시간들을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배움의 소중함과 기독교를 가르쳤다. 나는 북신동 집에 돌아오면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골목대장을 하고 대장이라고 △ 이렇게 생긴 고깔모자를 썼다고 한다.그리고 어머니가 땅거미질 무렵에 교인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좁은 골목에 들어 설 때에 내가 유치원과 통영교회 유년주일학교에서 배운 동요들을 소리 높이 부르고 있었다고 어머니는 전해 주셨다.내가 진명유치원에 다닐 때에는 교회 유년주일학교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이들이 빠짐없이 ‘좆 같은놈’, 말마다 좆, 씹을 하는 통에 아연질색하였다. 나는 통영이란 수려한 경관을 지닌 고향을 지금은 1년에 몇차례씩 방문한다. 어릴때의 그 낙원, 통영교회와 진명유치원은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앞서 말한 두 선교사가 10년쯤 전에 세계 최고의 미항(美港)을 지닌 통영을 방문했을 때 “그 아름답던 통영이 고층건물과 난개발로 망쳐졌다”고 탄식하셨다고 한다.나에 있어서도 분명 통영은 내 꿈같은 고향인데 계획없는 난개발로 딴 세상이 되어 있음을 한없이 안타깝게 생각한다.특히 통영교회 유년주일학교 때 세계적 유명한 작곡가 윤이상씨가 그 천재적 음악을 토할길이 없어 유년주일학교에서 동요를 가르쳤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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