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근대 교육의 효시 통영호주선교사의 집, 무려 6개 학교를 운영한 까닭은?

지금도 인구 14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 통영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수많은 예술가들과 지도자들이 배출된 것은 우리에게 자랑이기도 하지만 큰 궁금증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영의 아름다운 자연풍광 때문이라고 에둘러 설명을 한다.

과연 그럴까?

이러한 설명은 충분치 않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통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함이지 인재들이 길러진 원인을 말하려 함이 아님을 적어도 통영 사람들은 간파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통영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첫째는 삼도수군통제영에 의한 한양의 문화와 문명이 통제사가 부임하는 통영별로를 따라 직접 유입이 된 영향이고 둘째는 통영 근대화의 산실 역할을 했던 호주 선교사에 의한 근대식 교육의 영향에 기인 한다고 본다.

그러면 인재 육성에 결정적 요인이 되는 교육에 있어서 통영 최초의 근대식 교육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1894년부터 1941년까지 통영에서 활동한 24명의 호주 선교사 중에서 왕대선 이라는 한국이름을 가졌던 왓슨(R.D Watson) 선교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무어(E.B Moore) 선교사와 함께 통영과 인근 섬들을 돌아보면서 이 지역에 교육기관이 절실한 것을 깨닫고 1911년에 한국에 온 그의 부인과 함께 이 지방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인 진명학원을 설립했다.

하지만 정확한 설립연도는 알 수 없는데, 우리 지역의 여성독립운동가인 최덕지 선생의 재판 기록을 보면 대략적인 그 연도를 알 수 있다.

최덕지 선생은 1901년 6월25일 통영 항남동에서 태어나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유로 투옥됐다.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1945년 5월18일 평양지방법원 예심계 조선 총독부 판사 가네우다가나우(兼田峽)의 판결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최덕지가 통영군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장로파 기독교에 입교하여 12세(1912년)에 통영진명학원에 입학하고 16세(1916년) 봄에 진명학원을 졸업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1912년 봄에는 진명학원에서 입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면 진명학원의 설립자 왓슨 선교사는 1910년12월에 내한했고, 부인 왓슨 선교사는 1911년 11월에 내한 한 것을 볼 때 진명학원의 시작은 1912년 초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왓슨 부인은 처음부터 보통학교(현 초등학교)의 설립을 의도하고 준비했으나 조선총독부의 고의적인 교육통제 방침 때문에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이후 다시 1915년 진명보통학교 설립허가원을 제출했으나 개정사립학교 규칙이 정하는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여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24년에는 학령기를 넘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야간학교를 설립, 보통학교에 준하는 과목과 성경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진명야학교 이다.

여자 선교사들이 유난히 많았던 호주선교부는 교육과 여성 및 아동들에 대한 사회복지 활동과 정신적 가르침에 주력했다.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하기까지 통영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은 모두 24명이었다. 이중 남자는 10명 여자는 14명 이었고, 여자 선교사 중 4명은 결혼을 하였으나 나머지 10명은 독신이었던 것을 보면 여자 선교사의 역할이 이 지역에 끼친 영향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여자 선교사들의 섬세함과 약자에 대한 배려와 애정은 남자 들이 따라 올 수 없을 만큼 탁월 하였다.

당시 호주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학교를 보면 진명학원(1912년), 진명 야학교(1924년), 진명 유치원(1923년), 진명 강습소(1923년), 도천 야학교(1926년), 동부 유치원(1928년) 등 이다. 이 작은 통영에 6개의 다양한 학교가 세워졌고 이를 통해 수많은 인재들이 길러졌다.

왓슨 선교사 부부로부터 시작된 진명학원 등 여러 학교는 지금까지도 통영시민들의 기억 속에 '신 교장'으로 남아 있는 스키너(A.M Skinner, 한국이름 신애미) 선교사가 1921년 부임해 오면서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기관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교육학을 전공한 그녀는 1940년까지 통영선교부에서 활동하면서 진명 유치원 원장으로 일했다. 그녀가 활동한 시기에 김춘수 시인이 진명유치원을 다녔는데 그때의 모습을 회상 할 수 있는 시 한편을 소개해 본다.


시詩 속의 풍경 - 김춘수

호주 아이가
한국의 참외를 먹고 있다.
호주 선교사네 집에는
호주에서 가지고 온 뜰이 있고
뜰 위에는
그네들만의 여름 하늘이 따로 또 있
는데
길을 오면서
행주 치마를 두른 천사를 본다.
〈김춘수 유년시(幼年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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