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발견하고, 읽고, 소개하는, 삼박자가 좋아 책방주인이 되었다. 그렇게 책을 통해 살고 있다(그런 제게도 '인생의 책', '좋아하는 책'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이런 지면이 생긴다면, 나는 최대한 많은 독자를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책에 관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건네는 일은 '큐레이팅 북숍'을 운영하는 동안 계속될 나의 소망에 가깝다. 그전에 먼저 곳곳에 숨어있는 많은 사람들을 한 권의 책을 향한 독자로 끌어들여야 한다라며 책을 고르는 소박한 업의 결론을 내렸더랬다. 이렇게나마 아래의 소설집을 고른 이유를 들어본다.

천명관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시작은 그렇다. 적을 때는 서너 권 많을 때는 십여 권. 읽던 책을 의무감에 끝까지 보겠다고 달려드는 취향도 내겐 없고, 한 책이 마무리되어야 그 다음 책이라는 질서도 내겐 없다. 늘 여러 권의 책을 지천에 두고서는, 읽고 싶은 것을 골라 읽는 곳까지 읽는다.

천명관의 단편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또한 시작은 그랬지만 도중에 먼저 읽던 책들을 제치고 우선순위를 점하더니 끝내는 마지막까지 읽어 내려가게 되었다. 이런 예외의 경우는 두 맥락에서 발생하곤 한다.

첫 번째는 가짜가 진짜 같고 진짜마저도 가짜와 헛갈려 도무지 손을 놓을 수 없는 경우이고, 다음은 저자가 운을 띄우는 생각이나 이념이 내 가치관과 시선에 딱 들어맞아 끝을 확인해야만 하는 경우이다. 이 소설집은 첫 번째 경우가 아니었나한다.

가짜가 진짜 같고 진짜마저 가짜와 헛갈리는 것은 결국 '이야기의 힘'과 '글의 목소리'에 좌우된다. 보잘것없는 하급 인간의 지리멸렬한 삶을 그려내기 위해 살인과 협박, 난잡한 섹스와 상스러운 하루가 등장한다 해도 그 두 요소에 따라 불편할 수 있고 담담할 수 있다.

짜내어진 듯 생경할 수도 있고, 자연스레 응당 그러리라 납득할 수도 있는 것이다. 프루스트도 인상파 화가와 작품들을 통해 문학과 예술의 진리를 발견하지 않았나. 그 중요성은 소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작가만의 문체와 시각에 있다 했다.

소설집에 실린 8단편의 소재 또한 뭐 그리 신선할 리 없다. 소재는 분명 인생의 비극적 요소와 비참함, 위선, 아이러니, 생존의 굴레, 본능과 내밀한 속사정을 쥐어짜기에 그저 그만인 제법 익숙한 것들임이 분명하다.

커다란 틀로 짜인 서사를 주축으로 그를 위해 탄생시킨 인물들은 아니지만, 하늘 아래 한 점일 뿐인 어느 인간에 돋보기를 가져다 대고 이리저리 굴려보는 것을 이보다 더 능숙히 할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인간 부류를 콕 집어, 그의 주변과 삶의 조각을 설명하는 작가의 목소리에 빠져들게 된다.

이야기 속 인물과 대사는 무엇 하나 허튼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다. 그것은 이미 소설과 이야기라는 틀을 벗어나 한 인간의 삶에 내가 끼어들었음을 의미했고, 멈추지 않은 채 앉은 자리에서 8편을 내리 읽어나가도록 했다. 다만 "8편의 이야기가 그야말로 너무 재미있다"는 감상을 이리도 길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소설 본문을 직접 소개하면 어떨까?

여자는 절대 도시를 떠나 살 수 없다는 주변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아내는 처음부터 귀농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환경운동 계열의 시민단체에서 열심히 활동한 이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골로 내려오기 전부터 이미 비누와 생리대를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고 언제나 친환경 제품들만을 고집했다.

그것을 그녀는 '대안적 삶'이라고 했다. 정환은 그 대안적 삶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거대기업이 지배하는 매트릭스의 그물망에서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별다른 토를 달진 않았다.

다만 개량한복만은 제발이지 입고 다니지 말라고 부탁했다. 개량한복이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고 반문하자 그는 그냥 촌스럽기 때문이라고 했다.

개량한복을 입은 여자와 섹스를 하고 싶은 남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야.

정환은 아내의 다소 유난스러운 점을 언제나 유머로 넘겼다. 하지만 그것이 한때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그녀가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택한 애티튜드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거기엔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끝내 예술가가 되지 못한 안쓰러움과 포기하고 싶어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만의 소박한 허영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애써 그것까지 까발려서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허영심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내는 이미 귀농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불안하리만치 강한 확신이 있었다. 도시에서 직장을 잃은 이들이 새로운 금맥이라도 발견한 듯 너도나도 시골로 향할 때 엉거주춤 엉덩이를 빼고 있던 그를 닦달해 귀농 대열에 합류하게 한 것도 결국 아내였다. 하지만 인생은 유머로만 채워질 수는 없는 법. 대안적 삶에 대한 희망은 유머조차 되지 못한 채 오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 단편 <전원교향곡>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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