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8월 15일, 감격스러운 조국 광복을 맞았다. 일제는 8월 18일 최덕지를 비롯 독립운동가들을 죽여 없애려 했다. 8월 17일 밤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옥문이 열리고 평양 형무소에서 출옥했다. 최후까지 남은 14명이 독립의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이날 안이숙 모친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때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첫째줄 왼쪽부터 최덕지 이기선 방계성 김화준 오윤선 서정환, 둘째 줄 왼쪽부터 조수옥, 주남선, 한상동, 이인제, 고흥봉, 손병목 순이다.

통영은 다른 지방에 비해 교육열이 높은 편이었다. 특히 여성들에 대한 교육열이 유달리 높았다.

최덕지는 교회 조직을 통한 여성과 어린이 교육, 유치원 설립과 야학으로 민족적 여성교육 운동과 자주독립의식을 심는데 주력했다.

통영의 민족여성운동 단체 중 중심적 역할을 했던 통영부인회는 최덕지를 비롯한 대부분 기독교인들로 구성됐다. 1928년 8월 24일 대화정 교회에서 30여 명이 모여 설립했다.

이들은 야학을 개설,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고 당시엔 생소 하였던 기술교육을 가난한 여성들에게 가르쳐 여성의 사회·경제적 역할을 도모했다. 일본 경찰의 집요한 간섭과 방해로 침체기를 겪기도 했지만 이들의 활동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발했다.

또한 최덕지는 애국부인회의 총무로 활동 하면서 독립자금을 비밀리에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철저한 민족여성의식이 강화되는 데에 있어서 내적으로는 남녀가 평등해 지고 독립을 위해서는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외적인 요소로는 민족적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워진 마산 의신여학교에서 공부와 교사인 박순천과의 만남이었다.

1898년 경남 동래에서 태어난 박순천의 본래 이름은 박명련이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민족적 여성의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1919년 3월 22일 만세운동으로 경찰에 체포 됐다. 풀려난 후 부터는 이름을 박순천으로 바꾸면서 까지 활동을 지속했다.

최덕지는 학교의 방침과 박순천의 영향을 받아 민족적 여성의식이 더욱 강화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족적 인물로 성장한 그녀가 통영 진명유치원 교사로 부임 하면서 통영만세 운동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부산과 경남 지역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1일 부산에서부터 시작, 3월 13일 동래, 창녕, 밀양, 통영, 3월 14일 의령, 3월 17일 함안, 3월 18일 합천, 진주, 하동으로 이어져 나갔다.

통영에서 교육과 자주독립운동 그리고 여성 운동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최덕지는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통영민들과도 함께 항일운동과 여성운동을 전개하고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당시 통영에는 항일비밀 단체로 혈성단과 상해독립단 통영원조회가 조직됐었다. 이 중 혈성단은 남성중심인 단체였던 반면 상해독립단 통영원조회는 여성중심의 단체였다.

1920년대 들어 최덕지는 진명유치원 교사로 있으면서 민족과 통영의 현실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일본경찰의 감시와 탄압은 여성운동을 침체로 빠뜨렸고 설상가상으로 통영주민들의 생활고는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특히 1928년부터 1931년 까지 장기간 계속된 가뭄과 기근으로 인해 통영부둣가엔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갈려는 사람들이 매일 100여 명씩 모여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20대 초반의 최덕지는 기독교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이럴 즈음 이용도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에 왔다. 1931년 10월 6일부터 1주일 동안의 부흥집회에서 최덕지는 이용도 목사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았다.

이용도 목사는 당시 북간도를 비롯한 전국의 교회를 대상으로 수많은 부흥회를 인도 했다. 성경의 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고통과 아픔을 암울한 식민지 한국의 상황에 비춰 보면서 기독교가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민족적 사명에 대해 설교했다. 그는 가는 곳곳 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민족적 사명의식을 던져 주었다.

민족의 장래를 고민하던 최덕지에게는 민족의식과 사명감에 불길을 당기는 계기가 됐다. 이용도 목사가 부흥회를 마치고 경남 사천으로 갈 때 최덕지는 그곳까지 그를 따라갈 정도로 깊은 감동과 사명감에 도전을 받았다.

제4대 대통령 영부인이 된 공덕귀 여사는 최덕지에 대해 그 날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 했다.

"한 주일의 집회가 끝나고 이 목사는 사천으로 떠났다. 많은 분들이 그를 따라 사천으로 갔다. 그 중에는 저 유명한 최덕지 선생도 끼어 있었다. 나도 어른들 틈에 끼어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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