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독립운동의 근거지 송정택의 사랑방, 문화동일까? 북신동일까?

▲ 통영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북신동 토성고개 송정택 사랑방의 현재 모습.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문화동 송정택 사랑방은 독립운동 보다는 훨씬 후대의 산물이나 허물어가는 통제영 공방의 목재로 지은 의미 깊은 곳이다. 사진은 문화동 송정택 사랑방에서 열린 송씨 문중 잔치를 기념 촬영한 것이다. 사진 맨 뒷줄 오른 기둥 옆 갓을 쓴 어르신이 송정택씨이고 그 옆으로 맨오른쪽 까까머리 학생이 송정택의 3남인 송두영씨이다. 사진은 송두영의 장남 송종설(송종택의 손자)씨가 제공했다.
통영독립운동의 산실인 송정택 사랑방의 주인공 송정택 어르신.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서구 열강들이 각축을 벌였던 일제강점기와 그 시기를 같이 한다.

통영호주선교부가 통영근대화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면,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통영 청년들의 활동 근거지는 송정택의 사랑방이라 할 수 있다.

통영만세운동 이후 일본 경찰의 삼엄해진 감시를 피해 청년들이 한곳에 모여 민족의 장래와 독립에 대한 새로운 진로를 찾고자 고심하며 활동하는데 있어서 구심점이 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송정택은 1885년 5월 20일 광도면 안정리 상촌(제적등본 기준상 안정리 1665번지)에서 태어났다. 호는 춘암이며 명필가로 서예에 능한 선비이고 유학자였다.

그는 한 해 약 8천석을 추수하는 대지주로서 안정리 일대의 상촌, 중촌, 하촌과 동해면, 거류면, 한실 등 여러 곳에 넓은 논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인심이 후덕하고 덕망이 높아 소작인들과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당시 소작인과 지주의 분배가 4:6이었으나 가뭄이나 홍수로 인해 흉년이 들어 소출이 줄어들면 그 비율을 6:4로 하여 소작인의 어려운 형편을 도와 소작료를 저감해 주었다. 이렇듯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그의 인품과 가난한 소작인에게 베푸는 인정이 남달리 많았다.

이에 감동한 소작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두어 송덕비를 세웠는데 자신이 살고 있는 안정리는 물론 죽은 이후에도 무덤에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

안정리에서 통영읍 북신리 215번지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통영청년단과 교유하며 민족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갈수록 일제의 탄압과 전쟁물자 조달을 위한 수탈은 심해져 가고 만세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에 대한 감시의 눈빛도 살벌해져 가는 시기에 통영의 청년들이 자주독립에 대한 열의와 헌신을 잃지 않고 다짐하게 하는데 있어서 사랑방의 역할은 실로 컸었다.

그런데 통영청년들이 모여 자주독립을 의논하고 활동을 도모한 송정택의 사랑방은 어디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화동 86-1번지 현재 문화유료주차장 터를 송정택의 사랑방이라 알고 있다.

하지만 통영의 청년들이 자주독립을 논의할 당시의 송정택 사랑방은 문화동이 아니라 북신동이다.

송정택의 손자인 송종설(69세)에 의하면 사랑방은 문화동 86-1번지가 아니라 북신동 215번지 한옥 기와집이라고 한다. 송정택의 삼남인 송두영(송종설의 부친)이 북신동 215번지에서 통영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문화동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동 86-1번지의 한옥집과 송정택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송종설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가 삼도수군통제영 경내에 있던 12공방을 훼파하고 부술 때 이를 본 할아버지 송정택이 안타깝게 여기고 부서져 버린 공방의 오래된 목재를 구입, 문화동 86-1번지에 한옥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문화동 집서 송씨 집안사람들이 잔치도 하고 다양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문화동을 독립운동 당시 송정택 사랑방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기상 훨씬 후대에 건립, 독립운동 당시의 본거지는 북신동 215번지이다. 이 집은 지금도 토성고개를 넘어오다 보면 기와 대문과 집 형체가 오롯이 살아 있다.

해방 후에는 송정택을 비롯한 읍내 유지들이 모여서 일제에 의해 훼손돼 있는 착량묘를 보수공사 하기로 의논했다.

이때 송정택은 세병관 운주당 뒤편에 있던 일본 신사건물을 부수고 돌을 가져와 착량묘 마당에 깔아 밟고 다니자고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착량묘 바닥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와 함께 석공, 인건비, 운반비 등 일체의 비용을 송정택이 부담하기로 하고 쌀 50가마를 선뜻 내어 놓기도 했다.

일제의 억압과 착취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았는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자유를 쟁취하기까지 선조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 민족적 서사시로 읽혀지는 3월이다.

이제는 민족의 가슴에 울분과 억압이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어둡고 무거운 3월의 글을 마치고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봄의 서곡과 함께 4월의 글을 쓰고 싶다. 여기저기서 겹겹이 쌓인 껍질을 헤집고 나오는 새싹과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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