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교장으로 불렸던 통영근대교육의 대명사, 스키너(A.M. Skinner)의 위대한 삶

통영최초 사립유치원인 진명유치원의 졸업식 장면과 호주선교사의 집. 맨 뒷줄에는 진명유치원 교장이었던 호주 장로교 선교회 통영선교부 선교사 스키너(Miss.A.M. Skinner·한국이름 신애미·왼쪽에서 4번째) 교장과 윤보선 대통령 영부인이자 사회사업가였던 공덕귀 여사(2번째), 항일운동의 대명사 최덕지(3번째), 유치환의 부인 권재순(5번째)씨가 당시 교사로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신애미 선교사 기념비 탁본모습.

1900년대 초 호주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국가적으로는 일제강점으로 인해 국권과 자유가 유린당했고, 사회적으로는 착취와 불안, 가난과 질병으로 삶과 환경이 피폐해져 있었다.

도무지 희망을 기대 할 수 없는 황무한 조선 땅에 발을 내디딘 선교사들은 어떻게 하면 이 민족에게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기도했다. 그들은 부산을 거점으로 하여 배를 타고 통영을 정기적으로 순회하며 이 지역을 답사했다. 여러 해 동안 실시한 지역조사의 결과는 우선 사람들을 질병으로부터 치료 받게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미래를 향한 유일한 대안으로 교육을 꼽았다, 그 결과 통영에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과 학교가 세워졌다.

특히 통영은 여성 선교사들이 많이 왔기 때문에 교육과 여성에 대한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들은 탈무드에 나오는 말처럼 사람들에게 고기를 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법은 알려주었다. 1894년부터 1941년까지 약 24명의 선교사들이 통영에서 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 아직도 통영 사람들의 기억 속에 신 교장으로 남아있는 여성선교사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스키너(A.M. Skinner)로 한국 이름은 신애미이다. 호주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1914년 9월 내한, 거창선교부의 교육선교사로 부임을 했다. 1916년 마산선교부로 옮겨와 활동을 하다 1921년부터는 통영선교부에서 육영사업과 복음전파사업 그리고 여성 계몽운동을 담당했다.

스키너 선교사는 교육에 탁월한 재능과 성실함을 지녔다. 그녀가 설립한 학교를 보면, 1923년 진명유치원과 진명 강습소, 1924년 진명 야학교, 1926년 도천 야학교를 세웠다. 1929년에는 왓슨 선교사가 귀국하자 통영에 최초로 세워진 진명학원 교장을 맡아 일했다.

1940년 휴가차 호주로 귀국하기까지 그녀가 유치원 원장과 진명학교 교장으로 있을 시기에 통영을 빚낸 많은 예술가들이 이 학교에서 신교장의 영향을 받으며 근대화된 서구식 교육을 받았다.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모든 선교사들이 강제출국 당하는 바람에 신애미 선교사는 휴가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해 졌다.

신교장은 명철한 두뇌와 경건한 신앙생활 그리고 따뜻한 성품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는 그녀의 교육에 대한 남다른 헌신과 인재를 기르는 열정에 감동하여 그녀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939년 3월 26일 제직회에서 신애미(愼愛美) 한국사역 25주년 기념행사를 하기로 결의, 1939년 4월 16일 제직회에서는 신애미 교장 25주년 기념예배에 대해 교회에서 예산 10원을 부담하기로 했다. 그리고 1939년 5월 7일 제직회에서는 기념식을 거행하고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녀의 공적을 기록한 기념비는 통영호주선교부 건물(양관)이 있던 우물 근처에 세웠다. 그러나 1943년 12월 일제에 의해 이 기념비는 훼파되었다.

휴가로 떠난 귀국길에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신 교장은 호주에서 교육에 전념하다 1953년 세상을 떠났다. 스키너는 평생 독신으로 오직 한국을 위해 기도하며 교육에 희망을 걸고 헌신한 선교사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1년이 지난 1954년 8월 1일 충무교회는 신애미 선교사 추도 예배를 드렸다. 그 후 1970년 4월 5일 충무교회 제직회는 신애미 선교사 기념비를 재 건립하는 것을 가결했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한 한국을 떠난 지 77년의 긴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통영의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까지 어둡고 황무했던 통영을 위해 얼마나 많은 기도와 땀과 눈물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필자는 1990년부터 이들의 행적을 찾아 섬과 육지를 답사하며 이방의 나라에서 삶을 바친 그들의 숭고한 삶에 매료, 100년 전 호주선교사의 눈에 비친 조선과 같은 나라를 찾아 선교사가 되는 삶을 선택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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