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의 무조건적 사랑으로 이방의 나라 조선에서 천대받고 멸시 받던 사회적 약자를 뜨겁게 사랑한 청순한 인상의 알렉산더 선교사 이야기는 통영의 잔잔한 바다에서 들려오는 애잔한 노래와 같이 회자된다.

'안진주'라는 한국 이름의 알렉산더 선교사는 영국의 전통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5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856년 그녀의 부모는 호주로 이민, 빅토리아주 콜링우드에 거주했다.

아버지는 목사로 빅토리아 서부지역의 몰트레이크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아버지는 농촌지역의 작고 어려운 교회를 순회하며 도움을 주고 선교에도 많은 관심이 있어 빅토리아주 선교 총무로도 일을 했다. 그래서 그녀의 집은 늘 선교지에서 돌아온 선교사들로 북적되곤 했다.

1885년 3월 25일 출생한 그녀는 이러한 환경 속에 자라면서 자연히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멜버런의 PLC(Presbyterian Ladies College)에서 공부했고, 멜버런 대학에서는 중국선교를 위해 중국어를 공부했다.

하지만 조선의 상황을 알고 난 후 진로를 바꾸어 한국선교를 계획했다. 조선에서 가장 시급한 것 중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유아들에 대한 교육이었다. 그래서 유치원 교사로서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노스 멜버런의 유치원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 후 빅토리아 장로회가 세운 여성 지도자 훈련원(Deacone-ss Institute)에 입학, 지도자 교육을 받았다.

이 모든 준비와 훈련을 마친 그녀는 1911년 1월 멜버런을 떠나 조선을 향하는 장도에 올랐다. 그녀의 이러한 준비 과정을 보면 선교사로 한국에서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자신을 철저히 준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911년 2월 부산에 도착한 그녀는 1913∼1916년 부산일신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1918년에는 통영선교부로 와서 어린이와 여성 교육에 전념했다.

그녀는 두 살 여자 고아인 김복순을 양녀로 삼아 성장하기까지 돌봤고, 호주로 돌아간 후에도 서신으로 꾸준히 돌보며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그녀는 한국인 전도부인과 함께 배를 타고 다니면서 작은 섬들을 찾아가 가난하고 병든 사람
들을 돌보며 전도하고 사경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 중 욕지도 서산리 군자
포에 살던 장바울과의 만남은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장바울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다리가 아파 침을 맞았는데 그만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장애를 입고 말았다. 결혼도 포기한 채 외롭게 살아가던 그를 눈여겨 본 안진주 선교사는 욕지도를 방문할 때 마다 장바울을 찾아가 사랑을 베풀며 위로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렇게 해서 신앙을 갖게 된 장바울은 주일이면 산 너머 논골 예배당까지 지게에 업혀 예배당에 가곤 했다. 장바울에게 안진주 선교사는 하늘이 보내 준 천사와 같이 유일한 위로자였다.

어느 날 안진주 선교사가 한산도를 거쳐 욕지도에 사경회를 인도 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장바울은 반갑고 감사한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훗날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가 호주에서 공부할 때 안진주 선교사의 조카로부터 받아 알려지게 됐다.

----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자매되신 안부인은 나 더러운 병신을 특별히 위하시던 은혜는 태산과 같사오나 교제는 누님께 천총지공도 갚은 수가 없으니 참 부끄럽습네다. ----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을 당한 안진주 선교사는 귀국 후 스키너(A.Skinner) 선교사와 함께 Wyalla라는 곳에서 유치원 시작했다.

은퇴 후에는 아동보호협회와 브루클린에 있는 유치원에서 봉사를 했는데 늘 꽃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가리켜 '꽃을 가진 여인(the lady with flower)'으로 불렀다.

해방 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그녀를 교수로 초빙했으나 건강상 이유로 한국으로 다시 오지 못했다.   1967년 4월 5일 부르클린 유치원에서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평생을 독신으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해 꽃처럼 향기롭게 살다간 그녀의 나이 8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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