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 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거이득 선교사, 힘없는 여성 직업 훈련의 선구자

거이득 선교사를 비롯 수많은 선교사들이 활동한 통영 호주선교사의집이 198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다. 사진은 박형균 통영사연구회장 소장본.

1928년 통영선교부 진명야학교 교장…장애·매춘·이혼여성의 어머니
한글 자수교육…손수건, 책상보, 앞치마 멜버런 판매, 수익금 환원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필자는 가끔씩 나와 나의 가족 그리고 나의 조국보다 타인과 타인의 가족 그리고 저들의 나라를 더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본다.

이러한 질문은 100여 년 전 조선에 와서 조선 사람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에디스 커어(Edith A. Kerr, 한국이름 거이득) 선교사의 삶을 알고 난 후 부터 생겨난 스스로에 대한 혹독한 질문이다.

거이득 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에디스 커어 선교사는 한국에 부임한 호주 선교사 중에서 특출한 인물이었다.

호주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사려 깊은 지성과 깊고 넓은 인간애 그리고 기독교 복음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지닌 그녀는 통영과 부산에서 가난하고 보호 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혼신의 정열을 쏟아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 나누며 교육자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우리에게 끝없는 사랑과 애정을 간직했던 헌신적인 선교사였다.

여성 직업교육의 선구자 거이득 선교사

일생 동안 미혼으로 살면서 교육활동과 절제운동을 전개하고 저술활동을 통해서 여성들을 일깨우며 여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1921년 9월 호주 멜버런을 떠나 조선으로 향한 그녀는 도착 후 진주선교부로 부임을 받고 언어 공부에 주력을 하는 한편 시원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8년 통영선교부로 옮겨와 진명야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장애여성, 매춘여성, 이혼당한 여성,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쫓겨난 여성들을 위한 직업교육을 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활동을 일제가 방해를 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한글과 자수, 영농기술을 가르쳐 생활대책을 도왔다.
특히 이들이 자수로 만든 손수건, 책상보, 앞치마 등을 멜버런에 보내면 멜버런의 클린스가에 위치한 장로교 본부의 여전도회 연합회 사무실과 티룸(Tea room)에서 판매했고, 그 금액을 다시 통영으로 보내 여성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귀한 일을 했다.

그녀의 이러한 특별하면서도 헌신적인 활동은 당시 체류하고 있던 여러 나라 선교사들의 귀감이 되었고, 1938년에는 조선의 모든 교회와 선교사를 대표해 탐바란에서 모인 세계 교회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노골화 되자 조선에 거주한 모든 외국 선교사들이 철수하게 되자 호주선교부에서도 귀국명령을 내렸다.

에디스 커어는 1921년 조선에 와서 1941년까지 꼭 20년 동안의 사역을 중단하고 일제의 침략이 끝나면 다시 올 것을 다짐하며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철수했다.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늘 조선과 통영을 그리워하며 언젠가 조선에 다시 들어갈 것을 계획하고 보다 더 효과적인 활동을 할 목적으로 오르몬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는 호주에서 신학사 학위(B. D)를 취득한 첫 여성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마침 서울의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초청을 받고 꿈에도 그리던 한국으로 가기를 원했으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는 의료진의 충고에 따라 여전도연합회에서는 그녀의 한국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1950년 이후부터는 빅토리아주 바라랏(Barrarat)에 있는 클라렌돈 장로교 여자학교 (Clarendon Presbyterian Ladies College)의 교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그녀가 선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던 칼톤(Calton)에 위치한 여선교사 훈련원에서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1893년에 태어난 거이득(에디스 커어) 선교사는 1976년 83년의 생애를 마감하고 캔터베리가에 위치한 침례교 양로원에서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조선과 통영을 향한 지고하면서도 보편적 인간애로 모자이크된 그녀의 삶은 석양에 붉게 채색되어 가는 통영의 섬과 바다 같이 잔잔하게 회자되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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