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딩거와 이렌 포스트, 100여 년 전 40여 일의 항해 끝에 통영에 온 까닭은?

▲ 복원 예정인 통영 호주선교사의 집 조감도.
▲ 트루딩거 선교사와 유능한 간호사였던 부인 이렌 포스트.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계절의 여왕 오월이다. 누구나 이때가 되면 오월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소망을 가져 본다. 인간의 삶이 소중하고 숭고한 것은 그 횟수나 기한이 한정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초월,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의미와 가치를 인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용기만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100여 년 전 약 40여 일간의 항해 끝에 겨우 닿을 수 있는 미증유의 땅 조선에 온 호주선교사들은 하나 같이 모두가 다 잘 갖추어지고 준비된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 흥미로운 인물이 트루딩거(M. Trudinger, 한국이름 추마전) 선교사이다. 그는 1883년 9월 25일 영국 욕사이어(Yorkshire) 맨스톤(Manston)에서 출생했다. 모라비안 신앙을 가진 부모를 따라 그도 모라비안의 신앙을 가졌다. 남호주 아델레이데 대학교에서 공부를 한 그는 해외선교에 매우 적극적인 모라비안의 신앙전통에 따라 당시 풍토병에 의해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아프리카 수단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두 번이나 열병에 걸렸으나 다행히 생명을 잃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그곳에서 활동을 할 수 없어 호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삶을 타인을 위해 가장 숭고하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며 기도했다.

마침내 그는 목사가 되어 다시 한번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오르몬드 대학교(Ormond College)에 입학해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20년 간호사인 베라 이렌 포스트(Vera Irene Foster)와 결혼한 후 호주에 미련이 생기기 전에 떠날 것을 각오하고 곧 다음 해인 1921년 멜버른을 떠났다. 멀고도 지루한 항해가 끝나고 부산에 도착한 후 곧바로 마산선교부에 부임 했다.

그 후 1928∼1935년 통영선교부에서 7년 동안 활동을 하였다. 외국인이지만 통영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 진종학 목사와 함께 동사목회를 하며 거제 유천교회와 지세포교회의 당회장을 지내기도 할 만큼 그는 친화력이 있고 소탈 했다.

그의 성격은 매우 활동적이고 친절했으며 언제나 열정이 넘쳐 났고 현지 적응력이 탁월하여 이방인이 아닌 마치 조선 사람과 같았다. 전도사들과 권서가들을 통괄하며 지역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는 책임을 맡기도 했다.

마침 통영에서 의사로 통영과 섬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던 테일러 선교사가 진주선교부로 떠난 이후 진료의 공백이 생겼는데 간호사였던 트루딩거 선교사의 부인이 테일러를 이어 치료와 시약활동을 이어 나갔다.

트루딩거 부인의 통찰력과 혜안은 남달랐다. 당시 어린아이들의 영양상태와 위생상태가 매우 열악하여 어린이 건강관리소(Baby Welfare Centre)를 운영하기로 생각했다. 당시 통영뿐만 전국에서 영·유아의 사망률이 매우 높아 아이를 낳으면 일정기간 동안 호적에 올리지도 않을 만큼 심각한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아동을 위한 건강관리 체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이러한 형태의 진료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부산·경남에 있는 5개(부산, 마산, 진주, 통영, 거창)의 선교부 중 거창을 제외하고 모든 선교부에서 활동을 할 만큼 이들 부부의 활동은 폭이 크고 넓었다.

그들이 이렇게 광폭의 활동을 한 것은 조선에서의 활동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한정적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며 그 기간 안에 더 많은 헌신과 희생으로 조선인을 사랑하고자 한 남다른 인간애에 대한 열정과 연민의 정이 깊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에 의한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1941년 본국으로 철수하기 까지 사랑과 헌신과 땀을 아낌없이 쏟았던 조선에서 20년간의 선교활동을 마친 그들은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조선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본국에 돌아가서도 쉼의 시간을 가질 틈도 없이 1942년부터 남호주에 있는 페놀라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그의 나이 59세로 인생의 완숙함과 신앙의 성숙함이 어우러진 시기였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아내가 건강을 잃기 시작했고, 이어서 그의 건강도 급속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만큼 그들은 조선에서 흔히 말하는 진액을 뺄 만큼 자신들의 건강을 돌아보지 않고 사랑과 희생에 몰입한 결과였다.

1949년 목회를 은퇴한 후 여생을 보내던 트루딩거 선교사는 1955년 9월 1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정들었던 이생에서의 땅을 떠났다. 그는 깊은 신앙과 헌신, 열정과 인내심, 그리고 관용의 마음을 가진 선교사였다.

우리는 그 부부와 함께 오늘처럼 오월의 맑은 하늘 아래서 얼굴을 마주하며 한 잔의 커피도 나누어 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숭고했던 삶을 더듬어 그리면서 트루딩거 그리고 이렌 포스터 그 이름을 되새겨 본다. 마냥 붙잡고 싶지만 오월도 그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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