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당한 선교사 왓킨스와 통영의 마지막 선교사 헤롤드 레인 부부.

한국 근대사에서 서양선교사들의 역할과 업적은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들의 발자취는 처음부터 고난의 시작이었다.

조선의 첫 선교사로 기록된 토마스는 1866년 9월 3일 영국의 제네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선군대에 의해 배는 불타고 토마스는 붙잡혀 대동강 백사장에서 참수를 당하게 됐다. 그는 그의 목을 내려치려는 박춘권에게 자신의 마지막 물건이라며 작은 보따리를 건넸는데 얼떨결에 받아 두었다가 나중에 보니 그것은 성경책 이었다.

조선 땅을 밟자마자 참수를 당한 28세의 청년 토마스는 대동강 한사정 백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다. 그 후 33년이 지난 어느 날 박춘권은 자신의 괴로움을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눈물로 호소하고 기독교인이 됐다. 그들이 어렵게 밟은 땅 조선에서 단 하루도 머물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사연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통영은 다른 지방과 달리 호주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화의 물꼬를 트게 되었는데 교육, 의료, 문화, 복지, 기독교 복음 전파 등 사회전반에 걸쳐 전인적인 활동이 이뤄졌다.

그 중 왓킨스(Rene F. Watkins, 한국 이름 왕영혜)는 1940년 한국에 도착한 몇 달 후인 1941년 통영으로 부임했으나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일제에 의해 같은 해 강제추방 당했다.

그녀는 짧은 기간이지만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 레인과 함께 마지막까지 통영선교부를 지킨 선교사로 기록되고 있다.

1941년 2월 28일 호주선교본부가 일본에 의해 전 세계가 전쟁의 공포에 휩싸이는 것을 우려, 세계기도회의 날(Word Day of Prayer)로 선포했다. 일본 경찰은 이 기도회가 반일 감정을 자극한다하여 이를 빌미로 사건화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41년 4월 1일 알렉산더, 트루딩거, 테드, 커어, 에드가, 왓킨스 등 한국에 남아 있던 많은 호주선교사들이 체포됐다.

급기야 호주 해외선교 위원회와 장로교 여자 선교회는 여자선교사들을 우선적으로 본국으로 송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호주선교사들은 1941년 한국을 떠나게 됐다.

마지막까지 통영선교부에 남아 있던 알렉산더와 왓킨스는 호주선교부의 여성 선교사 우선 송환계획에 따라 1941년에 철수했으나 남자 선교사였던 헤롤드 레인(Harold. W. Lane, 한국이름 나래인)은 가택 연금을 당해 본국으로 송환되지 못하고 있다가 그 다음 해인 1942년 11월에야 간신히 호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그는 1900년 9월 25일 호주 빅토리아주 베언스데일(Bairnsdale)에서 태어나 미르부 노스(Mirboo North)에 가까운 베리스 크릭(Berrys Creek)에서 성장하며 초·중학교를 마친 후 멜버런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목사와 선교사가 되기 위해 오르몬드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그 후 조선에서의 활동을 위해 부푼 꿈을 안고 1934년 12월 부산에 도착했다.

3년간의 어학공부를 마친 후에는 통영으로 부임,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에서 한국인 목사 이정심과 동사 목사로 활동을 했고, 한편 거제도 지세포 교회 당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레인 선교사는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해 호주로 돌아갔지만 그는 늘 조선을 그리워하며 다시 갈 것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조선이 해방 되자 그는 1946년 조지 앤더슨(Georgr Anderson)과 함께 조선에서의 선교활동과 문화동 269번지 일대에 있던 통영호주선교부 건물과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다시 왔다.

일제에 의해 피폐해진 한국을 위해 장기활동의 필요함을 느끼고 1949년 호주로 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1950년 4월 다시 한국으로 나왔다.

그의 앞에 펼쳐진 한국과 통영은 할 일이 너무나 많이 산적,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 나갔다.
하지만 다짐과 계획이 채 2달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면 다시 오리라 마음에 다짐을 하고 전쟁 중에 있는 한국을 위해 기도하며 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한국에 남다른 애정을 많이 가졌던 그는 1952년 통영호주선교부의 재산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나왔는데 이 때 문화동교회(현, 충무교회)는 7월 13일 송별 예배를 드렸다.

통영에서의 마지막 선교사였던 그를 위해 교회와 교인들은 20만원을 들여 금메달을 제작, 기념품으로 드리고 그간의 수고와 헌신을 위로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이다. 완성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고 피곤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통영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초연했던 삶을 보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미래는 나의 것이 아니라 후세들의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물밑에 가라앉은 하나의 징검다리 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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