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수군통제영의 경제왕국, 통영장시(統營場市)

▲ 영호남의 온갖 문물이 모인 통영장시(統營場市). 한국사진작가협회 통영지부 류태수 고문 사진제공.
▲ 춘원장시(春原場市)가 남문 밖 장터로 옮겨오면서 규모가 커진 통영장시. 한국사진작가협회 통영지부 류태수 고문 사진제공.

통영이 조선 최대 군사도시로 웅숭깊게 된 것은 삼도수군통제영 이설과 관련이 깊다. 살짝 귀띔하자면 1604년(선조 37)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유독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길 고집하면서다.

통제영은 객사인 세병관을 중심으로 군영과 관아가 하나둘씩 배치되었으며, 관아가 밀집된 아랫마을을 관청골(간청골)이라 불렀다.

그리고 통영성의 '남문(南門)' 밖에 유독 큰 장시(場市)가 형성됐다. 굳이 말하자면 남문 밖 이외에 장(場)이 없었던 건 아니다. 통제영 시대의 초기, 현 태평동과 정량동의 접경지인 통영성 동문(東門)과 통영상고 뒤편의 통영성 북문(北門) 밖에도 일찍이 장이 섰다.

이 장터들은 시간이 흘러 통영성 '남문' 밖의 시장에 흡수돼 '통영장시(統營場市)'라 불렸다. 이곳은 이상하리만치 영호남의 온갖 문물이 모여 오일장으로 성장했다.

통영성의 남문에서 동문의 작은 문인 '동암문(東暗門)'까지 촘촘히 형성된 장시. 오늘날 중앙전통시장의 효시라 하겠다.

동암문(東暗門)은 수구문(水口門)으로도 불렸다. 수구문은 '씨거문'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그래서 동암문에 섰던 장(場)을 '씨거문시장'이라 했다.

옛날 '성 안의 시체가 나가는 문'인 '시거문(尸去門)'에서 나온 말이다. 옛적 천민과 상인들이 드나들었고 죄수들이 이 문을 나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말 그대로 수구문 밖은 장안을 떠들썩하게 헤집고 다니는 파락호들의 세상이었다.  

장시는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 수적으로 증가해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1,000여 개의 장이 섰다.

경상도의 장시는 포구를 따라 형성됐으며, 17세기 초부터 곳곳에 설치된 관하의 창고(倉庫)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창고는 세입물과 군량의 비축 장소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통제영 산하의 관창인 섬진진(蟾津陣)은 창고를 관리하던 중요한 곳으로, 이곳에 '두치장(豆恥場)'이 개설돼 통영성의 시장과 빈번한 왕래가 있었다.

창고의 사령탑 격인 통제영 관청(官廳)의 창고인 공고(工庫)는 개영 초부터 설치돼각종 군수 물자를 조달했다. 그리고 공고의 주위에 씨줄날줄처럼 다수 공방들이 형성돼 상인들뿐만 아니라 시정잡배들도 모여들었다.

당시 강구안은 통제영의 중심 군항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엄청난 군영물자가 집결됐다. 그러다 보니 통제영 성문 밖에는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됐다.

19세기 후반에는 동문 밖에 있던 '춘원장시(春原場市)'가 남문 밖으로 옮겨오게 되면서 장터의 규모가 커진다.

당시 남문 성 아래의 기존 장터로 수용하기 어려워지자 1872년 제194대 채동건 통제사가 새 장터를 설치코자 강구(江口)를 메워 장터를 열었다. 이곳이 지금의 중앙전통시장이다.

조선후기의 문헌인 <통영지(統營誌, 규장각도서 12186)>에 '성 아래의 시장터가 원래 협소해서 다 수용하지 못했는데 채동건 통제사가 임신년(1872) 강구를 매립하여 많은 백성들이 장을 보는데 편리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장터는 4개의 상점과 1개의 도가가 개설됐다. 상점과 도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미전(씨전)' 35곳, '포목전' 23곳, '물화전' 17곳, '남초전' 22곳, 그리고 '해삼도가' 8곳이 있었다.

상점의 구체적인 취급품목은 '미전'은 쌀과 곡식, '포목전'은 베와 무명, '물화전'은 각종 잡화,
마지막으로 '남초전'은 담배였다. 1개의 도가인 '해삼도가'는 해삼 도매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삼도가는 거제, 고성, 남해를 근거지로 하는 상인들과 오랫동안 교역했다는 통영지(統營誌) 기록이 있다. 무엇보다 4개의 상점 중 미전이 가장 큰 상권을 형성했다. 큰 상점의 번영을 시샘하듯 1882년 이곳에 큰 화마가 들이 닥쳐 소실되기도 했다. 옛 통영지도(1865년 제작)에 표기된 당시 미전은 남문 앞에서 동암문 앞까지 뻗어 있어 규모가 상당했음을 가름할 수 있다.

통제영 산하의 통영장시는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도시 확장으로 활기를 띠었고 근대에는 어시장의 전초기지로 거듭났다. 조촐한 어촌에서 시작한 장터가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중앙전통시장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과거는 미래를 여는 열쇠다. 선조들이 일꾼 통영장시를 재조명해 봄으로써 통영전통시장의 방향키를 조정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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