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영후 일제강점기 훼손된 원문성터는 통영을 찾는 이들이 북신만의 아름다운 해변 풍광과 미륵산의 영봉(靈峯)을 대하면서 비로소 통영을 오감으로 느끼는 곳이다.

최근 통영시의 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발굴된 통영 원문성의 유구(遺構)는 지역사회의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한 평가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비밀스런' 자문회의에서 나온 전문가들의 평가를 이해할 수 없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함부로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원문(성)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이에 맞는 보존 혹은 개발의 선택에서 신중하고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하는 일이다.

조선 수군의 해방처(海防處)인 통제영은 통영성이 만들어진 숙종대 이후 그 위상을 높이고,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며 군문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육로로 들어오는 외적의 침임에 효율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숙종 8년 1682년(통제사 원상(元相))에 이르러 통제영 성 북쪽인 이곳에 성문을 세웠는데, 그것이 원문(轅門)이다. 2층 문루로 이루어진 통제영의 위상에 걸맞는 통제영의 관문이자, 통제영의 외성(外城)으로 완성되었다. 2층의 문루는 '공신루(拱辰樓)'로 칭했으며, 위층에는 '삼도대원수원문(三道大元帥轅門)', 아래층은 '삼도대도독원문(三道大都督轅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원문성은 높이 13척(약 4m, 통영성은 15척 약 4.7m, 참고로 문경세재의 석성 2~4.5m)의 성벽이 좌우로 바다 속까지 이르러 완벽히 이 곳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원문의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영조 18년에는 문루의 좌우로 성가퀴를 쌓아 방어의 효율성을 높힘과 동시에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보완작업을 거치며 정조 9년 이방일(李邦一) 통제사때 다시 축성, 원문성을 통하지 않으면 통제영으로 들어 올 수 없는 완벽한 육로의 요새가 되었다.
원문성과 같은 존재는 전라우수영과 고흥 녹도진성에서도 확인된다. 이들도 공히 개미 허리 같은 짧은 길목을 막아 적의 침략과 이동을 막는 관문성(關門城)의 역할을 하는 한국 수군진영의 독특한 방어성이었다.

원문은 한국의 성곽체계가 자연적, 지리적 특성을 활용한 방어시스템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해자나 기타 방어시설의 여부를 어느 정도 갖추었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원문을 유지하기 원문창(轅門倉)을 따로 둘 정도였다. 통영 원문(轅門)은 해상의 방어지대로 통하는 관문이자 통영성의 완벽하한 외성(外城)이었다. 이러한 독특한 성곽구조는 독특한 지형을 이용한 한국에서도 몇 안되는 군사 문화적 자산이다.

원문(轅門)의 기능과 중요성을 알리는 기록들은 다수 발견된다. 이는 통제영의 방어체계에서 원문이 가지는 의미가 컸음을 증명한다. 통제사가 원문을 나가 영송하는 것을 문제로 삼는가 하면(경종실록 8, 경종 2년 6월 15일 무진), 거제로 귀양 간 송시열이 외부인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통제사가 기찰(譏察)하는 일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원문성의 역할을 강조하였다(승정원일기 613책, 영조 2년 3월 26일 무오). 이는 원문(성)이 통제영과 그 남쪽에 있는 거제를 비롯한 도서지역으로 통하는 관문이었고, 함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임을 말한다. 조선후기 통제영의 팽창과정에서도 인근지역을 비롯한 전국의 유민들이 통제영으로 몰려드는 상황에서도 원문을 통과해 통제영 지역으로 유입되는 민호는 매우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원문아래 죽림지역, 용호지역 근처 민가들의 형성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정조4년 임금이 통영의 형세를 묻자 이성원이 이르기를 '통영은 지세가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다가 바다 입구로 들어가므로 산이 둘러싸고 바다에 막혀 있으니,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형세가 여기에서 끝이 난다'고 하고 이어 '치첩(雉堞)이 땅에 가득하고 가함(舸艦)이 나루에 빽빽하게 들어찼으며, 십 리의 원문(轅門)에 앉아서 십만의 수사(水師)를 거느리니 삼도(三道)의 군사가 모두 그의 지휘를 받고 있다'라고 하였다(일성록 정조 4년 경자 6월 26일 계유). 또 고종 11년 이유원은 왕의 질문에 '통영의 원문 안으로는 암행어사도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짜임새가 있다' 하고, '바다로 들어가는 가장 좁은 곳에 원문(轅門)을 설치했기 때문에 본영까지 십리의 거리로 아주 장대하고 견고한 배방지로서는 제일이다'고 보고 할 정도였다(승정원일기 고종 11년 갑술 7월 30일 경오). 이처럼 원문이 가지는 군사적 의미는 매우 엄중하고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고종실록 6권, 고종 6년 8월 27일 병인)으로, 통제영의 방어에 매우 중요했던 곳임을 재삼 확인시켜 준다.

한편 원문(轅門)이라는 명칭이 곧 통영으로 환치(換置)되는 다수의 기록이 있다. 정조대 임금이 통영이 조잔(凋殘)된 이유를 묻자 이창운이 "원문(轅門)내 4천 가호(家戶)들의 생리(生利)가 바다에서 나오는 이익을 잃어 조잔되어 간다"라는 표현처럼 '통영 = 원문내'라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승정원일기 613책, 영조 2년 3월 26일 무오). 이는 통영에 사는 사람이나 호(戶)를 말하는 다른 표현으로써 원문내민轅門內民(戶)이라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 외에도 정조실록 7권, 정조 3년 3월 19일 계묘, 승정원일기 1465책, 정조 4년 6월 26일 계유, 승정원일기 1641책, 정조 12년 4월 22일 갑인, 승정원일기 1651책, 정조 13년 1월 17일 갑술, 등 참조) 그리고 '원문외(轅門外)'는 명확히 고성(당동촌)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승정원일기 1957책 순조 8년 11월 12일 계유). 이처럼 원문은 곧 통영의 경계이자 통영을 상징하는 표상적 의미를 지닌 통제영의 대표적인 관방처 중 하나였다.

이상에서 원문(轅門)의 관방으로써의 중요성과 의미를 살펴 본 것같이, 조선시대에 원문이남이 곧 통제영이라는 인식은 보편적인 것이었고, 그 의미를 소홀히 할 수 없다. 통영은 조선시대 해상방어의 요새지로써 화려하고 권위 있는 수많은 공해들이 통제영의 영화스러움을 보여 주는 유적이긴 하지만, 방어체계의 핵심인 관방처(關防處)에 대한 인식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 통영의 중요한 관방처는 현재 그 실체가 보존, 인식되고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다. 통영지(統營志)에 따르면 통제영의 5대 관방처로는 강구(江口), 수항루(受降樓), 동서누상고(東西樓上庫: 전선에 필요한 각종 기물들을 보관), 방영(防營:견내량) 그리고 원문(轅門)이다.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과거의 모습을 유지, 아니 '보존'(복원이 아니라 보존이다)하고 있지 못하다. 강구안의 경우 이미 시대적인 변화과정에서 새로운 공간으로 재정립된 자연스런 변화라고 하더라도, 통제영의 5대 관방처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지니지 못한 채 통제영이나 이순신 운운하는 것은 억지스럽기만 하다.

무조건 과거의 유산이나 유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도 옳지는 않다. 통영이 역사적 변화과정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공간, 새로운 풍경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있다. 최소한 통영의 역사적, 문화적, 환경적 정체성에 부합하는 도시로써 미래를 설계하며 나아가야 한다. 향후 발견된 원문성의 유구가 허물어지고 아파트 단지로 변할지, 보존될지는 명확히 확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지금 통영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토목공사와 건축으로 파괴되는 역사적 문화적 유산들은 최소한 원상을 유지하기 힘들어 진다는 슬픈 예감을 지울 수가 없고, 이 시대를 사는 '통영인'으로써 역사와 후세에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고성부사를 지냈던 오횡묵이 지은 통영원문에 대한 시(詩)가 원문(성)의 중요성을 대변한다.

<오횡묵, 통영원문(統營轅門)> (시 해설 고영화, )
원문 아래 물이 활처럼 굽어, 양 땅 사이 잘록한 허리모양이다 (轅門之下水如彎, 蜂腰形便兩地間).
최고의 우두머리 삼도 대원사, 막중한 한 나라의 통제사 관문이로다 (最雄三道大元師, 莫重一邦統制關).
임진란에 기인하여 이 문을 세우니, 충무공의 위망이 두드러져 산과 같다 (    自壬亂設此門, 忠武威望斗與山).
성가퀴가 원문에서 바다 끝에 이르러, 바다와 육지의 위협을 방어하는 중요한 길목이네 (雉堞自門至海止, 水陸之禁重防閒).
한 사람이 관문을 지켜도 만 사람이 와도 뚫지 못하며, 산을 겨드랑이에 끼고, 바다 건너 넘어가는 것도 어렵다 (一夫當關萬莫開, 挾山超海越亦艱).
늙은 내가 이곳에 이르러 헛되이 어정거리며, 돌다가 얇은 글로 시 한편을 읊을 뿐 (老我到此徒徊徨, 只吟一詩薄言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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