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절벽이었다. 바다 너머에서 건너온 시커먼 암흑이 입을 쩍 벌리자 난생 처음 보는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괴물들은 다짜고짜 집을 부수기 시작했고, 돌담과 밭을 깔아뭉개었다. 악마의 자식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용초 주민들의 악몽이다.

용초도는 아픔의 섬이다. 피맺힌 우리 현대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섬이다. 그래서 무거웠다. 가봐야지 하면서도 쉽사리 배표를 끊지 못했던 섬이었다. 어느 날 먼 걸음 한 제자들을 데리고 불쑥 용초도를 찾았다. 기대도 없이, 준비도 없이 그냥 건너갔다.

1952년 5월 평화롭게 보리타작을 준비하던 용초도는 무지막지한 미군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100여 채의 집들은 불태워지고, 700여 명의 주민은 강제퇴거령 앞에 속수무책으로 이웃 섬과 뭍으로 쫓겨나갔다. 이웃한 추봉도와 함께 당한 날벼락이었다. 포로수용소가 세워지고, 8천여 명의 북한군 포로들이 수용되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폭동을 일으켰던, 소위 악질 포로들을 분리 수용한 것이다.

포로수용소는 지옥이었다. 낮은 연합군의 세상이지만, 밤은 포로들의 세상이었다. 밤마다 인민재판이 벌어졌고, 즉결 처분으로 생명을 잃어버린 주검들이 누대에 걸쳐 삶의 터전이었던 곳에 버려졌다.

전쟁이 끝나고 북한군 포로들이 떠난 뒤에도 주민들은 섬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되돌아온 국군 포로들이 사상검증과 재교육을 위해 집단 수용되었다. 용초도는 또다시 포로수용소 못지않은 공포의 섬이 되었고, 이번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1954년 4월에야 주민들은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보상도 없었고, 지원도 없었다.. 쓸만한 시설물 마저 모두 철거해서 가져가 버렸다. 그렇다고 산목숨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고, 고향을 떠날 수도 없었다. 맨손으로, 피땀으로 다시 밭을 일구고 집을 지었다.

용초 마을 뒤편 언덕에서 거대한 물탱크를 만났다. 지름이 18.5m, 깊이가 2.7m나 되는 거대한 크기다. 이 물이 있어 지옥은 유지될 수 있었고, 이 물로도 지옥의 불은 끄지 못했다.

뒷등을 돌아내려 간 곳에서 용머리 바위를 만났다. 붉은 바위를 겅중겅중 건너며, 내내 무거웠던 머릿속에서 검은 거품이 꺼져내리는 걸 느꼈다. 대신 해맑은 물줄기가 샘솟았다.

아름다웠다. 탁 트인 가슴에서 탄성이 피어났다. 저 멀리 매물도와 소매물도, 등대섬이 힘껏 밀어 보내준 바닷물은 맑고 깊었다. 내 속까지 훤히 들여다 보였다.

너럭바위에 앉아 준비해온 충무 김밥을 나눠 먹었다. 행복해하는 제자들의 얼굴을 보며 내 마음은 널을 뛰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섬이 가장 행복한 희망의 섬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용초도는 그만큼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욱 슬펐고, 더욱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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