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자유발언] 김이순 의원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들리시에는 대한민국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독립기념공원이 있다. 여기에는 이승만, 안창호, 윤병구, 이재수, 김종림, 김호, 한시대, 김형순, 송철, 김용중 등의 10인의 기념비와 독립문의 상징물이 있다.

이 공원은 한인들의 영원한 독립기념공원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이 지역을 찾는 한인 역사 탐방객과 리들리시와 자매도시인 통영시에 대한 이미지 각인과 홍보효과도 커 미주 한인들의 통영시 관광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

리들리시 한인회 박경덕 장로와 남가주학회 김운하 교수의 증언에 의한 김형순 씨 소개를 하고자 한다.

김형순 씨는 1886년 5월 4일 경상남도 통영군생이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전액장학금을 받으며 학당을 다녔고 1901년 졸업을 하게 된다. 졸업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한인 통역관 겸 인솔책임자로 일하게 된다. 거기서 6년을 일하다가 고국이 그리워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일제의 통치를 견딜 수 없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1913년 미국샌프란시스코 LA나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봄 LA 북쪽에 위치한 리들리시에 있는 한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묘목상회를 차린다. 묘목상회를 하면서 넥타린(털없는 복숭아)을 개발하여 미국 전역에 보급하게 되고, 묘목상회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김형순 씨는 한인 최초 백만장자의 대열에 오르게 된다.

김형순 씨는 사업으로 번 돈 중 많은 금액을 독립자금으로 내놓는다. 당시 임시정부 자금이 28만불 정도였고 그 중 20만불이 리들리시의 한인들에 의해 독립자금이 만들어졌으며, 20만불 자금 중 상당 금액이 김형순 씨가 낸 독립자금이며 이 자금은 중국 상해와 독립운동을 위한 각 처소에 쓰였다고 한다.

90년전 미화 20만불은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한화로 계산하면 지금 약 일천일백억원 정도 된다고 한다. 적지 않은 금액의 일부를 독립자금으로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에 김형순 씨가 없었다면 독립운동의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증언이다.

1940년에 들어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한인들을 위한 많은 업적도 남겼다 한다. 한인들의 사업지원과 자녀들에 대한 장학사업으로 한인들이 미국사회에서 인종차별을 이겨낼 수 있도록 했으며 전쟁 후엔 경기도 평택군 이북면에 고아원을 설립하여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돌보았고,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뒷받침해 주었다고 한다.

이분의 이력에서 보았듯이 임시정부 시절 상당액의 독립자금을 댄 독립운동가의 한사람이지만 우리가 배운 역사교과에는 한 줄의 기록도 없어, 이러한 사실을 우린 모르고 자랐고 현재도 모르고 있습다. 우리들은 후세들이 역사의 교과에서 김형순 씨를 알 수 있도록 관계부처에 청원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생생한 증언에 의한 역사의 사실을 묻어 두어서야 되겠는가.

통영의 우리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김형순 씨의 독립 및 애국정신을 높이 받들어 기억하고 기릴 수 있도록 통영에도 리들리시와 같은 독립기념공원 조성을 촉구한다. 통영의 전 단체가 참여하고 전시민이 동참해 의미있는 김형순 씨의 독립공원이 조성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행정적 지원을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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