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침묵의 언어요, 그림은 침묵의 시'라고 한다. 그리고 '음악은 만국공통어'라는 말도 있었다.

부산에 있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던 때의 일이다. 당시 거처를 따로 마련하는 일이 번거로워 캠퍼스 내 쾌적한 게스트룸에서 여섯 해 가량 신세를 졌다. 그 무렵, 저녁이면 옆 인도인 교수의 방에서 곧잘 이상한 노래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말에 곡조를 붙여 감정을 표현한 인도의 노래려니 짐작은 하면서도 내게는 이상한 소음으로만 들렸다. 낯선 언어, 낯선 음조로 불리어진 그 노래는 인도인 교수에게는 향수를 달래주는 고국의 가락으로 정겨울지 모르겠지만 내 귀에는 낯설고 불편한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노래가 들려올 때마다 '음악은 만국공통어'라고 배웠던 어릴 적 기억이 씁쓸하게 떠오르고는 했다. 음악은 만국공통어? 서양 클래식음악 대명사격인 이 제국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거창한 명제는 학창 시절 만고불변의 진리로 통했다.

그래서 낯설고 어려운 바흐며 모차르트 교향곡을 어느 자리에서건 모른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한결같이 즐긴다는 음악을 모른다고 하기에는 내게 용기가 부족했다.

나는 '칸타빌레' '무아' 같은 음악실을 적잖이 드나들며 이해가 쉬운 '즉흥환상곡', 'G선상의 아리아' 등을 신청해 들으며 남모르게 자신의 무지를 해소해 나갔다.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지 나중에는 교향곡과 오페라 곡을 익숙하게 듣는 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음악에 관한 나의 무지는 그것으로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30대 초반, 서울역 건너편 <뿌리깊은 나무> 편집부를 방문한 길에 우연히 듣게 된 판소리가 나를 다시 음악에 무식한 놈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재미삼아 '토스카' 3막을 구음으로 줄줄이 엮어낼 수 있던 내게, 그날 처음 접한 판소리는 음악이 아니었다. 부질없이 질러대는 고함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판소리를 음악이 아니라고 무시해버려도 뭐라 흉볼 사람 없는 개명된(?)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날 객석에 앉아 있던 청중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객석 맨 앞줄 10여 명의 외국인들과 객석 맨 뒷줄에 앉아 연신 무릎을 치고 얼씨구! 추임새를 넣으며 즐기던 대여섯 노인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외국인들은 우리 전통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숨을 죽이고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러나 부질없이 질러대는 고함소리에 마냥 신명을 내며 흥겨워하고 있던 노인네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귀에는 단순한 고함소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노인네들에게는 신명난 음악으로 들리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나의 귀와 노인네들의 귀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 궁금증 때문에 나는 틈틈이 판소리 공연장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2,3년 공부를 계속하고 나서야 나는 노인네들의 흥과 추임새를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음악이라는 것이 만국공통어가 아니라 언어처럼 어릴 때부터 습득해야만 이해가 가능하고, 그것이 추억과 관련을 가질 때 평생을 함께 가는 것이라는 사실도 짐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1천 5백여 년 전 가야국 가실왕께서 일찍이 '여러 지방의 방언이 각각 다른데, 하물며 성음(聲音)이 어찌 한결 같으랴'라고 갈파했다는 사실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 경상도 메나리조, 전라도 육자배기조, 서도지방 수심가조 등이 각기 다르고, 비록 같은 음악문법으로 작곡한 프랑스와 독일의 음악이 다르며, 러시아와 미국 음악 역시 각기 그 특색을 달리하고 있지 않던가. 드뷔시와 라벨의 음악에서 베토벤이나 말러의 장중함을 찾아볼 수 없고, 미국의 거슈윈이나 그로페의 음악에서 러시아의 우수를 찾아보기 힘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음악은 사용하는 언어의 인토네이션과 자연환경과 살아가는 배경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정서가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은 지방마다 그 특색을 달리하고, 따라서 언어처럼 익히고 연습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배우지 않아도 통하고 즐길 수 있는 만국공통어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적지 않은 공을 들여 나는 판소리 등 우리 음악에 관한 무식도 웬만큼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우리 것을 도외시하고 외국 것을 먼저 익혔다는 죄책감이 은근히 나를 압박해왔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우리 음악의 맛과 멋과 신비감을 살려 몇 편의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나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인도의 노래를 '소음'으로 귀찮아할 처지가 아닌 셈이어서 마냥 귀를 열어 두고 흔쾌히 들어주고는 했다.

그런저런 인연 때문인가, 만년에 통영에 와 자리잡은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통영은 '한국 예술의 수도'로 손색이 없는 도시다. 다른 어느 지방보다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 예술분야의 자산이 넘쳐난다.

통영오광대, 승전무, 남해안별신굿 등도 통영의 자랑스러운 전통예술 자산이다. 거기다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 지정된 통영은 매년 국제음악제를 개최하며 세계 현대음악 교류의 중심지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어디 높이고 고일 것이 음악뿐이겠는가. 문학, 미술, 음악 및 전통예술 등 통영이 가진 모든 예술적 자산을 다 높이고 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예술적 자산이 원융 회통하며 상승할 때 통영의 위상이 한층 높아지리라 믿는다.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 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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