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실질문맹률 OECD국가 중 최저'라는 기사를 보신 적 있으세요?

우리나라 청년 독해력은 높은 반면 중·노년층의 독해력은 세계 최저 수준이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읽고 쓰기 쉬운 한글 덕분에 기본 문맹률은 제로에 가까운 우리나라의 중·노년층의 독해력이 OECD 국가 중 왜 세계 최저 수준이라니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실질문맹률이란 무엇일까요? 실질문맹률이란 글을 정확하게 읽을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질문맹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문해력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문해력의 취약성에 대해서는 이미 2001년 조사 결과로도 알수 있었고, 그로 인해 평생교육 및 성인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노력이 새로이 조명됐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 노년층은 간단한 약 봉투의 복용법 정도도 스스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기본 문맹률은 제로에 가까운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이 실질 문맹률 높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이 기사를 보고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던 대화의 일방통행의 경험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인터넷 기사에 달린 웃기지만 웃지 못 할 댓글 유머도 떠올랐습니다. 다소 길고 장황한 기사의 요지는 파악하지 못한 채 눈에 들어오는 한 줄의 말에 말꼬리를 잡는 듯한 댓글 그리고 그 댓글의 댓글에는 서로 난독증이세요?라는 조롱의 말들이 오가곤 합니다.

이야기의 전체 맥락은 파악하지 못한 채 오고가는 댓글의 모습은 바로 그것이 '실질문맹률'의 단면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국어 교육은 단순히 글을 읽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국어 교육을 할 때에는 4가지 영역에서 접근합니다. 말하기, 읽기, 쓰기, 듣기 4가지 영역이 모두 국어의 영역입니다.
일방통행의 대화에서의 답답함을 4가지 국어 영역에서 살펴본다면 첫째, 말하기와 듣기의 기본 훈련이 안되어 있음을 찾을수 있습니다. 대화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화가 자연스럽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만을 기억하거나 반복하고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거나 중간에 가로막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식의 대화가 이어진다면 그 누구도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상실될 것입니다.

둘째, 읽기와 쓰기를 살펴볼 때 읽고 해독하기보다 늘 해오던 방법에 의존하는 생활태도에 문제점이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조사에서 나타났듯 약 봉투에 표기된 복용법을 이해 못하여 투약이 어렵다거나, 가전기기의 설명서를 읽고 이해하기조차 어렵다는 것은 읽고 이해하기의 노력이 부족하며 다시 되묻기에 익숙한 분들의 생활방식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짐작 됩니다.

약 봉투의 복용법을 읽고 이해하기보다 약사의 설명에 더 의지했을 것이며, 가전기기의 설명서를 읽기보다 평소 해오던 아는 방법으로 가전기기를 사용하거나 익숙한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사용했을 생활방식을 미루어 짐작하게 합니다.

OECD 국가 중 평균 근로 시간이 가장 긴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아마도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는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바쁘고 힘든 삶에서 우리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훈련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실질문맹률에 대처하는 방안에 대한 기사에는 하나같이 독서를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생 책이라고는 관심도 없었고 흥미도 없었던 그 누군가에게 "책을 좀 읽어 보는게 어떠세요?"라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독서 보다 즐거운 대화를 위한 연습을 권하고 싶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귀를 열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소위 말하는 '꼰대'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질문맹률 문해력취약률 이야기 하다가 결론은 '꼰대'로 마무리가 되냐고요?

문맹률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소통의 단절 혹은 새로운 것에 대해 배타적인 마음의 자세가 아닐까하는 관점에서 이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즉, 국어의 듣기가 되지 않는다면 세대 간의 단절은 세대를 넘어 우리는 또 다른 꼰대가 되어갈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노인이 된 세대에서 실질문맹률이 또 다시 세계 최저 수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대화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느냐, 당신의 이야기만 하느냐, 대화의 훈련에 달려있지 않을까요?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귀를 열고 눈을 맞추고 나와 함께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정으로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 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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