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전래지명 가운데 '원문'이라 하면 무전동·용남면·광도면의 경계를 이루는 시가지 북쪽 입구의 고개를 일컫는다. 즉, 서쪽 북신만(北新灣)과 동쪽 죽림만(竹林灣)을 가르며 가늘게 연이어진 육로의 유일한 길목인데, 그 형세가 잘록한 목을 이루는 고갯길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 고갯마루에는 '원문검문소'가 있어, 통영으로 오가는 거의 모든 차들을 검문했다. 때로는 무장 군경들이 버스에 올라 차가운 눈초리로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던 슬픈 기억들이 상기되는 곳이다. 그래도 통영으로 귀향하는 차창 밖으로 탁 트인 북신만의 아름다운 풍광과 미륵산 영봉이 바라보일 때면 마치 어머님 품에 안기는 듯 포근한 안도감을 주는 아련한 추억이 어린 고개이다.
속칭 '어문', '어문고개', '어문마을', '어문개' 등으로 일컫는 토박이지명들이 있으며, 최근에는 남해안대로와 중앙로를 잇는 '원문로(轅門路)'를 비롯하여 '원문마을1길', '원문마을2길' 등의 새주소 도로명으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지명들은 모두 조선시대 통제영의 원문(轅門)과 그 원문성(轅門城)이 여기에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옛『통영지(統營志)』에 '통영성 원문은 통영의 북쪽 10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 즉 육로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곳이다'(轅門在營之北十里 卽陸路咽喉處)라고 한 곳이 바로 여기다.
'원문(轅門)'이란 군영의 입구를 칭한다. 옛날엔 군사가 주둔할 때 병거(兵車)를 둘러쳐서 진을 쳤다. 그 수레채를 마주보게 하여 문으로 삼았던 것에서 유래하여 군사가 주둔하는 진영 입구의 문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백여 년 전인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 직후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옛 이 고장 두룡포(頭龍浦, 현 통영시가지)로 옮겨 올 때다. 그 때까지만 해도 북쪽 내륙의 고성에서 이곳 통제영으로 들어오는 육로가 없어 나룻배를 타고 북신만(北新灣)을 건넜다고 한다.
즉 지금의 원문(轅門)고개 밖 마구산(馬廐山) 아래의 해안에서 나룻배를 타고 작은개(小浦) 동쪽의 굴리포끝(屈?浦末. 속칭 구루지끝)으로 건너 다시 명정동 고갯길을 넘어 통영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통제영을 설치한 수십 년 후에야 비로소 원문고개에서 오늘날의 무전동과 북신동의 북쪽으로 통하는 언덕길을 내어 나루를 건너는 폐단을 없앴다고 했다.(『統營志』小浦峙石像 2坐...甲辰移營初道路未修官民之行自轅門馬廐山下渡津於小浦之東屈?浦末通路於此峙)
명정동 고갯마루에는 당시 통영 입구의 이정표로 세운 돌벅수(石人)가 지금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원래 서낭당 돌탑과 함께 2기의 벅수가 길 양편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있었으나, 1970년대의 도로확장공사 때에 할멈을 잃고 할배만 길섶 언덕 위로 옮겨졌다. 그러자 할배 벅수는 지나가는 악동들이 던지는 돌팔매질의 표적이 되어 만신창이가 되었다가 필자의 중매로 주변을 단장하고 예쁜 각시를 얻어 새장가를 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원문은 통영성(統營城)이 축성된 4년 후인 1682년(숙종 8) 원상(元相) 통제사 때 창건되었으며, 아울러 그 좌우로 성첩(城堞, 성가퀴) 각 10타(?) 씩을 쌓아 원문성(轅門城)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그 후 1742년(영조 18) 송징래(宋徵來) 통제사 때 그 나머지를 축성하여 오늘날의 북신만과 죽림만의 양쪽 해안까지 이었으며, 1785년(정조 9) 이방일(李邦一) 통제사 때 이를 다시 고쳐 쌓았다.
원문의 2층 누각은 천하의 백성들이 임금의 덕을 우러러 받들고 귀의한다는 뜻의 공신루(拱辰樓)이라 했다. 그리고 다락 위층에는 '삼도대원수원문(三道大元帥轅門)', 아래층에는 '삼도대도독원문(三道大都督轅門)'이란 큰 편액이 각각 걸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원문은 수문장(守門將) 2인과 그 장졸들이 지켰으며, 성안에는 작은 우물과 안정사(安靜寺)에서 공물로 바친 종이를 관리하는 지창(紙倉) 즉, 원문창(轅門倉)이 있었다. 이 원문창은 1707년(숙종 33) 남오성(南五星) 통제사 때 지금의 동호동 남망산 해안의 옛 해송정(海松亭, 속칭 해송지이) 마을에 있던 지창(紙倉)에서 유래했다. 그 후 지금의 문화동정수장(속칭 배수지) 아래의 창골(倉谷, 현 중앙동)로 옮겼다가, 1805년(순조 5) 유효원(柳孝源) 통제사 때 원문성 안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이러한 통영 원문은 "암행어사도 마음대로 그 안을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짜임새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바다로 들어가는 가장 좁은 곳에 원문을 설치했기 때문에 통제영 본영까지 십리의 거리로 아주 장대하며 견고한 바다를 방비하는 곳으로는 조선에서 제일입니다."(『승정원일기』고종11년(1874) 7.30. 統營轅門內 則繡衣亦難入 規模之成 如是也... 入海最挾處 設立轅門 自轅門至本營爲十里 而壯固奇勝 爲海防之第一矣)라고 임금에게 보고될 정도로 그 웅대한 위용과 함께 경계 또한 엄중하기로 이름났었다.
당시 통제영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육로의 입구인 이곳 원문성(轅門城)은 통영8전선이 정박하는 통영항 강구(江口)와 동쪽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견내량 방영(防營)과 함께 통영을 방비하는 3대 관방처(關防處)였다.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은 일본의 침략을 방비하던 조선수군의 총본영이었다. 이러한 통제영의 통영성과 3대 관방처는 이미 각종 문헌 및 고지도에 수없이 고증되어 있음은 주지의 일이다.
최근 애조원도시개발사업 예정지에서 2016년 7월의 지표조사에 이은 발굴조사 결과 옛 통영 원문성의 실체가 더욱 명확히 재확인되고 있다. 이는 원문고개를 동서로 가르며 죽림만과 북신만으로 연이어지는 약 1㎞ 길이의 원문성 가운데 북신만 해안 기슭에 잔존하는 유구(遺構)의 일부분인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통제영 유적은 통영의 정체성이요, 통영인의 자긍이요, 통영혼의 상징이다. 결국 이의 보존은 통영의 정체성 확보요, 통영인의 자긍과 극일혼(克日魂)의 혼줄을 붙들어 매는 것이라 하겠다. 단언컨대 통영 원문성유적은 보존되어야만 한다. 이차에 유적의 보존과 도시개발을 병존하는 방안을 모색함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 기자명 한산신문
- 입력 2017.06.3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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