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와 벗님네야, 치명길로 횡행하세"
1866년 통영 게섬으로 장사 온 순교자 김기량 펠릭스베드로를 아시나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공식 방문,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량 순교자를 비롯 국내 천주교 순교자 124위(남자 100, 여자 24명)에 대해 시복식을 주례했다. 이날 김기량 순교자는 복자 반열에 올랐다. 복자(福者)란 천주교에서 성인(聖人)의 전 단계로, 공식적으로 뛰어난 덕행이나 순교한 이들로써 천주교 신자들이 공경해야 할 대상이다.
김기량 순교자.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로부터 시작 된다. A.D 30년 경 초대교회 때부터 박해와 순교를 통해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 했고, 우리나라도 1866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가 그 출발점이 된다. 이처럼 순교는 기독교 전파의 서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통영지역에는 순교의 역사가 없을까? 통영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지역에 순교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아니 우리지역에도 순교자가 있는가?"라고 오히려 반문하기도 한다.

통영지역의 순교자 이야기는 삼도수군통제영과 함께 한다.

첫 번째 순교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부산 동래에 사는 이요한 등 8명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발각되자 기장에 피신해 있다가 동래 포졸에게 붙잡혀 당시 삼도수군 통제영 본영이 있던 통영으로 압송돼 왔다. 통제영 관아에 붙잡혀 온 8명의 신자들을 문초한 결과 천주교 신자임이 확인되자 모두 참수되어 순교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두 번째 순교 역시 병인박해가 한창일 무렵 통영에서 김기량이라는 사람이 천주교 신자로 체포 됐다.

그는 제주도 함덕리(현,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김선달' 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1857년 2월 18일 동료들과 함께 장사를 하기 위해 제주를 출발, 육지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다. 중국의 광동 해역까지 표류해간 그들은 영국 배에 구조,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어 졌다.

그들은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휴양 중이던 조선 신학생 이(李) 바울리노를 만나게 된다. 바울리노는 김기량과 동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고 얼마 안 돼 그들은 신앙심이 아주 깊어지게 된다.

그 해 5월31일 홍콩의 외방전교회 부대표인 루이세유(J. J. Rousseille) 신부로부터 세례와 함께 펠릭스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조선으로 귀국한다.

제주도로 돌아 온 김기량은 이전과 같이 동료들과 함께 배를 타고 육지를 오가면서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가면서 그가 지어 불렀다는 천주 가사 한 수가 전하는데 이 신심가는 일종의 천주가사로 분류된다.

"어와 벗님네야, 치명길로 횡행하세. 어렵다 치명길이야, 평생 소원 사주모(事主母)요, 주야 앙망 천당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도주대전(能到主大殿) 하옵소서."

김기량이 쓴 이 가사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얼마나 깊게 배어 있는지 느낄 수 있다. 1866년 동료들과 함께 장사를 하러 경상도 통영으로 갔다가 통제영 산하 군졸들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그들이 상륙한 곳은 통영 게섬(현,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으로 추정된다. 통제영 관아로 이송되어 온 이들에게서 천주교 신자들의 물품으로 알려진 박하유가 나오자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문초와 형벌을 받고 혹독한 매질을 했으나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자, 관장은 그들 모두를 감옥으로 옮기고 교수형에 처 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그들 5명은 교수형이 되었는데 이때가 1867년 1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 51세였다. 관장은 김기량이 다시 살아날 것을 염려,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죽였다. 병인박해 치명 사적에 그의 순교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다.

"여비를 장만하고자 박하유를 팔러 통영으로 갔다가 군난이 대단히 심한 때였으므로 '박하유는 천주학장이의 물건이다' 라고 하면서 잡아 가두고 많이 때렸습니다. 추열(推閱)하는 말을 들은 사람은 없으나, 교우들의 말이 '김선달은 잘 치명하였다' 고 하였읍니다. 그 때 교우 네 사람이 함께 잡혀 형벌을 받다가 곤장을 맞아 죽었는데 김선달이 먼저 살아나고 다른 교우들도 살아났읍니다. 그가 위로하며 말하기를 '나는 치명하여 죽을 것이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 오시오' 라고 하였읍니다. 마침내 다섯 사람이 다시 교수형을 당해 순교 하였는데, 펠릭스 베드로는 특별히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하였읍니다. 나이는 51세 였읍니다. 동래 절영도 강마리아 기록 하옵니다."

주: 뮈텔 주교 기록, 치명일기로 제주시 조천읍에 순교자 김기량의 순교비가 그때의 일을 전하고 있다.

김기량의 고향 제주에는 순교현양비가 서 있다.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