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남 근대교육 효시는 1895년 설립한 남자학교인 '한문학교'(The Chinese School)

▲ 1933년 통영동부유치원 제1회 졸업생 모습(동아일보. 1933. 3. 20)
▲ 통영유치원 창립(동아일보. 1928. 10. 2)

필자가 해외 선교를 하면서 잊지 못할 힘들고도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2006년에는 시골 오지지역에 들어가 선교공동체를 만든 적이 있었다. 1.5 ha(4,500평)의 면적에 20가구의 원주민 100여 명과 지방 토착민 13가구 60여 명과 함께 생활했다.

그 안에 유치원, 문맹퇴치를 위한 공부방, 교회, 쉼터와 텃밭을 일구며 나름대로 공동체 규약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공동체 안에 사는 원주민과 지방 토착민은 같은 문화권에서 같은 국적을 가지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전혀 화합이 되지 않았다.

이들의 생계를 돕기 위해 땅을 일정하게 분배하고 채소를 재배해 자급자족하도록 했다.

그런데 지방토착민들은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채소를 키우는 반면, 원주민들은 거의가 텃밭을 활용하지 않아 잡초만 무성하게 자랐다.

가만히 살펴보니 단순히 게을러서가 아니라 경작에 대한 개념이 없는 듯 했다. 산에서 있는 그대로 사냥을 하거나 열매를 따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이런 방법에 생계를 의존할 뿐이었다.

공동체의 운영에도 심각한 위기가 닥치기도 했다. 이상과 기대로 어렵게 설립한 공동체가 제대로 굴러 가지 않고 무질서하기 시작했다.

심각한 고민에 빠진 필자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두고 오랫동안 기도하며 대안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우선 이 두 집단이 가지고 있는 차이를 하나하나 파악해 나가기 시작한 결과 몇 가지의 차이점을 찾았는데 필자의 눈을 크게 뜨게 하는 것은 '교육' 이었다.

원주민은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은 있지만 쓸 줄 모르고 나이를 모를 정도였다.

반면 토착민 집단은 나이가 고령인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초등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 인간은 교육을 받지 않으면 동물적 본능이 사고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 무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인류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보편적이며 강력한 자발적 사회 시스템을 꼽으라고 한다면 교육일 것이다.

아무리 극빈한 국가라 할지라도 교육제도는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히말라야의 깊은 계곡과 산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한 반드시 학교가 있고 교사가 있다.

한국의 근대화도 그 바닥에는 교육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국의 근대식 교육은 기독교 선교와 함께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 한국의 교육은 서당, 서월, 향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이 전부였다.

부산. 경남 근대식 교육의 출발은 1895년 베어드 선교사가 설립한 남자 학교인 '한문학교'(The Chinese School)가 그 효시이다.

베어드의 사랑방에서 시작한 이 학교는 잘못 표기한 영어식 학교명과는 다르게 한문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조선어, 산술, 지리 등과 더불어 성경을 가르쳤고 예배를 드렸다.

처음엔 5명의 학생으로 시작됐으나 그 해 2월 중순경에는 20여 명으로 불어났고 그 이듬해인 1896년에는 등록학생이 100명이나 되는 장족의 발전을 했다.

그만큼 당시 신학문은 생소했지만 세상의 이치와 사람의 사고를 새롭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던 것이다.

1년 뒤인 1896년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춘 개성학교가 설립되면서 점차 근대식 교육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소학교령이 발표된 이후 서울과 각 지방에 많은 공립 심상학교들이 생겨나게 됐다. 또 기독교 계통의 많은 사립학교들도 설립됐다.

본래 근대식 교육이란 서양의 학문으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통로는 기독교 선교와 더불어 시작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한국에서 기독교는 단순히 기독교의 복음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근대식 교육기관을 통해 선교를 시작함으로써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즉 기독교 선교사들의 학교설립은 한국에서의 근대교육과 근대식 교육의 모델이 되었고 또한 근대문명이 발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일찍이 해상교통이 발달한 통영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 부산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호주선교사 본부가 있던 부산에서 정기적으로 통영을 방문한 선교사들에 의해 이 지역에 학교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한편 호주선교부는 부산을 중심으로 진주, 마산, 통영, 거창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각 지부가 속한 지역에 학교를 설립함으로써 부산. 경남 지방의 교육을 주도했다.

따라서 부산 경남 지방의 근대식 교육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 전래에서 호주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고 발전됐다.

특히 호주선교부가 부산. 경남 지방의 교육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된 데는 여성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수적인 면에서 여성 선교사가 남성 선교사보다 월등히 많았고 이로 인해 유치원 교육이 특히 많은 발전을 하게 되었다.

다음은 부산 경남 지방 5개 호주선교부 소속 교육기관 현황이다. 이를 보면 여성선교사들의 어린이와 교육에 대한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1. 유치원: 부산(일신유치원 1918), 진주(진주유치원 1913), 마산(의신유치원 1924), 통영(진명유치원 1911, 동부유치원 1928), 거창(명덕유치원 1913)

2. 초등학교: 부산(일신여학교 1905), 진주(시원여학교 1906, 광림학교 1906), 마산(창신학교 1908, 의신여학교 1913), 통영(진명여학교 1914), 거창(명덕학교(강습소) 1915)

3. 중등학교: 부산(동래일신여학교 1909), 마산(호신학교 1925), 통영(진명야학교 1924, 도천야학교 1926)

4. 실업학교: 부산(동래여자실수학교 1935), 마산(복음농업실수학교 1934), 통영(진명야학교 1914, 진명학원(진명강습소)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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