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근대문화의 공공재 호주선교사의 집, 과연 기독교적인 의미만 지닐까.

김약국의 딸들 소설 속으로 떠난 답사 모습.
통영출신 박경리 소설가의 '김약국의 딸들'에서도 회오리치는 봉건사회로부터의 변화에 대한 갈망과 갈등의 양상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사진은 영화 '김약국의 딸들'의 한 장면.

역사적 사실을 내용으로 하는 글은 그것이 통사이든 지방사이든 객관적 사관(史觀)이 중요함은 두말 할 나위없다. 어느 한 쪽에 치우쳐 기술 한다면 이는 역사의 의의에 우(愚)를 범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오늘날 통영이 예술의 도시로 발돋움한 근원과 통영 근대화에 있어서 밑거름이 되었던 호주선교사들에 대한 유·무형의 산물들은 통영시민 모두가 공유하고 누려야 할 소중한 공공재이다. 이러한 것을 종교적 시각으로 보아 기독교인들만의 전유물이나 옛 이야기로 치부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번 글의 초점은 호주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활동 보다 이제껏 기술 되지 않았던 조선에서 선교사들의 활동을 가능케 했던 또 다른 측면에서 그 요인들을 살펴보자.

19세기 조선의 향촌 사회는 향촌 지배 세력 간의 대립 양상으로 변동돼 갔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농촌사회의 분화가 진전되고 신분제가 동요됨에 따라 지금까지 향촌사회의 지배권을 가진 사족지배체제(士族支配體制)는 크게 변화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남을 비롯한 부산·경남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상당히 늦은 시기까지 사족들의 지배 질서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원래 영남의 남인들은 숙종 때 폐비 민씨 복위문제를 계기로 실권한 갑술환국(甲戌換局 숙종 20년, 1694년) 이후부터 이미 정권에서 유리돼 있었기 때문에 중앙으로의 진출이 막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입원을 전적으로 향촌사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방의 신·구 세력간 대립은 다른 지방과 구도는 같으나 시기적으로 늦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영남 지방 남인계의 강고한 사족인 구향(舊鄕)의 향촌지배권은 중앙권력의 지원을 받는 소위 신향(新鄕)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신세력인 소위 '양반이 되고자 하는 자들'인 이들 신향들은 아직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는 못하였지만 새로운 사회세력으로서의 성장력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구향과 신향의 대립은 계속되었는데 18세기 후반에는 신향의 승리를 가져 오면서 향촌 질서는 '수령-이·향 지배체제(守令-吏.   支配體制)'로 재편 됐다.

이렇게 재편된 지배체제는 구향에 대한 반봉건적 사회이념을 불러 오기는 했지만, 중앙의 세도정권과 결탁, 농민을 수탈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수탈이 계속될수록 농민들은 정치적으로 소외 되어갔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억압에 신음했다.

결국 신향에 의해 형성된 반봉건적 사회 이념과 의식은 새로운 사상이나 이념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시대적 공간을 제공하게 되는데 이러한 시기에 천주교가 들어왔다.

초기에는 수많은 순교자를 낳기도 했지만 구향에 이어 신향들의 수탈과 억압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 반봉건적 저항의식을 담아 낼 수 있는 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당시 이러한 반봉건적 저항의식이 없었다면 천주교의 전파와 수용은 결코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향촌사회의 내부에도 친 개화적 성향을 가진 인사들이 있고 이들은 나름대로 시국 인식을 가지고 문명개화를 통해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다.

이들이 선택한 중요한 문명개화의 수단은 바로 근대식 교육기관의 설립과 기독교의 수용이었다.

결국 기독교가 전래될 당시 조선사회는 이미 근대화를 수용할 만한 내재적인 능력을 어떠한 형태로든지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근대화를 지향하며 노출된 조선 후기 향촌사회의 시대적 욕구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기독교가 채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선교사에 의해 전파된 기독교의 수용은 봉건사회의 지배세력에 맞서 문명의 개화를 갈망하는 세력간의 시대적 갈등이 작용한 시기에 이뤄졌다.

호주선교사들에 의해 근대식 교육과 영향을 받은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 에서도 이와 같이 회오리치는 봉건사회로부터의 변화에 대한 갈망과 갈등의 양상을 김약국 댁의 한 가정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고스란히 비춰 주고 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만약 이 시기에 기독교의 전래가 없었다면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피폐해진 민초들의 삶과 공허, 미래에 대한 욕구 그리고 사회전반에 걸쳐 발생한 정신적 공동화 현상은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돼 나아갔을까?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