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9월 30일 부산 사상교회 설립자 및 재직자 기념사진 속에서도 정덕생 목사가 보인다. 둘째줄 맨 오른쪽 인물이다.
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02년 손안로 선교사와 함께 경남 통영군 욕지도를 방문하고 그곳에 논골 교회를 설립 했다는 기록이다. 사진은 논골교회 예배당이 있던 곳의 표석.
조사 정덕생 목사.

지금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히말라야 지역은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을 만큼 8천 미터 이상 되는 14개의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2004년 1월 필자는 에베르스트 앞에 있는 6천2백 미터의 아일랜드 픽을 등반한 적이 있다. 등반대원 7명에 포터, 셸파 등 현지인 보조자 12명과 해발 3천 미터 이상에서 살아가는 좁교(야크의 일종) 7마리가 동원됐다. 이러한 보조 장치가 없으면 아무리 유능한 등반가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산을 오를 수 없다.

1953년 세계 최고봉 에베르스트를 최초로 등반한 뉴질랜드의 전설적인 산악인 힐러리 경(등반성공 후 기사 작위를 받음)은 네팔인 셀파 텐징 노르게이와 함께 이 산을 등반했다. 그 역시 셀파로서는 최초로 에베르스트를 오른 전설적 인물이다.

이들이 등반에 성공하고 하산 하였을 때 기자가 힐러리에게 질문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최초로 등반해 성공하였는데 에베르스트의 최정상에 먼저 발을 디딘 사람은 당신 입니까, 아니면 셀파 텐징 노르게이 입니까?"라는 질문에 힐러리는 "우리는 함께 정상을 밟았습니다" 라는 묘한 대답을 했다.

아무튼 역사는 세계 최초로 에베르스트를 등반한 사람으로 힐러리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등반에는 텐징 노르게이의 도움과 안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처럼 셀파는 등반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숨은 공로자이다.

이와 같이 조선에 선교사가 입국,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며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그 이면에는 조선인의 보조자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난호의 글에서 서양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요인들 중 당시 조선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1891년부터 1941년까지 풍토병과 과로로 순직하면서까지 열정을 쏟았던 많은 호주선교사들 중 가장 탁월한 활동으로 기억되고 있는 사람은 손안로(Andrew Adamson) 선교사이다.

그가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길을 안내하고 통역과 여러 가지 일들을 도맡았던 정덕생 이라는 조선인 조사(助事)가 있었다.

1900년 손안로 선교사는 경남의 여러 지역 중에서 욕지도를 중요 선교지로 정하고 정기적으로 이곳을 방문,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발동선(통통배)을 이용하여 통영과 욕지도를 왕래하였는데 이때 동래사람 정덕생(1881~1949) 이라는 조사가 늘 함께 하며 길은 안내하고 통역을 맡았다.

정덕생은 1881년 8월 30일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 283번지에서 정재진과 오성결의 다섯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 이름은 정치영이었으나 1911년부터 정덕생으로 개명했다.

정덕생은 21세 때부터 호주선교사들과 함께 부산·경남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고 1905년에는 기장 동부교회, 동래읍 교회(현. 수안교회), 통영대화정 교회(현. 충무교회), 의령 서암 교회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했다.

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02년 손안로 선교사와 함께 경남 통영군 욕지도를 방문하고 그곳에 논골 교회를 설립 했다는 기록이다.

이 교회는 훗날 욕지 동항리 교회로 개명 되고, 다시 욕지제일교회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에 의하면, "1902년 봄에 통영군 동항리 교회가 성립하다. 이에 앞서 선교사 손안로의 전도로 박명출, 박인건, 박래찬, 이영백, 최명언 등이 가르침을 믿고 촌사람들에게 내쫓김을 당하여 한없이 고생하면서 예배당을 건축하고 열심히 전도한 결과로 신도수가 나날이 늘어나서 예배당을 증축하였다"

또 다른 기록인 '한국영남교회사'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조사 정덕생의 전도로 박명출, 박인건, 박래찬, 이영백, 최명언 등이 가르침을 믿고 다섯 가정이 동참하였는데 논골 아래쪽 바닷가 마을에서는 조롱과 핍박이 극심하였기 때문에 1902년 봄 논골에 모여 조그마한 초가 예배당을 짓고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욕지 논골교회의 시작이다."

이처럼 호주선교사의 활동에는 온갖 핍박과 조롱을 감내하며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희생과 헌신을 인내로 극복한 조사의 숨은 공로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러한 조선인 조사는 호주선교사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에 온 거의 모든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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