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욕지동항리·대화정·미수·안정·장평, 20여 개 교회를 세운 인물은 누구일까

▲ 경남지역 교회의 개척자 아담슨(손안로) 선교사 부부. 사진 둘째줄 세 번째와 네번째가 아담슨 부부. 서부경남 20곳의 교회를 설립했으며, 통영에서도 호주 장로교 통영선교부를 설립하고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를 비롯 많은 교회를 세웠다. 경남 최초의 사립학교 마산 창신학교 설립자이기도 하다.

통영지방의 개신교는 호주 선교사들이 부산에 정착하고 경남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시작됐다. 처음으로 통영을 방문한 호주 선교사 무어(E. B. Moor)는 1894년부터 정기적으로 방문,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며 지역연구를 시작했다.

통영에서 활동한 호주 선교사는 12명의 부부 선교사와 12명의 미혼 여자 선교사가 있었다. 이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20여 년 간 통영에 머물면서 기독교 전도 활동과 의료 및 교육활동을 했다. 특히 진명 여학교를 설립, 여성 교육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들 중 매우 역동적이고 탁월한 활동을 전개한 선교사는 아담슨(Andrew Adamson, 한국이름 손안로)으로 그를 도와 함께 활동한 조선인 조사로는 정덕생, 송사원, 김낙진 등이 있다.  

아담슨은 호주에서 출생, 인도 장로교 신학교(Presbyterian College in India)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조선으로 오기 전 영국 성서공회 선교사로 5년간 북중국 지방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중국어를 이해하고 동양의 유교적 전통사회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에 적합한 인물 이었다.

그는 1902년 욕지도 동항리 교회(논골교회의 전신)와 1905년 통영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호주 장로교 연합회가 파송한 첫 호주선교사 데이비스는 1889년 조선에 도착 후 6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1891년 입국한 메카이 선교사도 건강상의 이유로 1893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조선 선교를 위해 자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풍토병과 전염병이 선교사가 오는 것을 어렵게 했다.

그래서 호주 빅토리아 청년연합회(The Fellowship Union in the State of Victoria)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지원자를 구하기로 하고 이 일을 청년연합회장인 길레스피(T. A. Gillespie)에게 위임했다.

길레스피 회장은 영국 방문 중 런던에서 영국장로교회 소속 앤드류 아담슨 목사를 조선 선교사로 선정했고 그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1894년 5월 20일이다.

아담슨 선교사는 부산에 도착해서 경험한 청일전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895년 5월 25일에 쓴 그의 편지에 의하면, "1895년 5월 25일, 26일에는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일장기를 앞세워 각종 장식을 한 춤놀이와  불꽃놀이를 하면서 전쟁의 극적인 장면을 재현하고 대규모 승전 축하 행사를 하여 일본인들의 자긍심을 과시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앞으로 호주 선교사들이 계획한 조선인을 위한 교육과 의료 활동에 큰 장애물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그는 1895년 6월 부산 초량지부 선교관을 완공, 초량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896년 3월에는 세례 지원자들을 위한 성경 공부반을 개설했고, 1896년에는 예배당 건립을 계획하고 휴가를 이용, 호주 빅토리아 지역을 순회하며 건축 기금을 모금해 1900년 6월 초량에 목조 예배당을 신축했다. 이것이 지금의 부산초량교회이다.

아담슨 선교사와 그의 조사(助事)들은 울산, 양산, 함안, 의령, 고성지역으로 선교구역을 확장하고 통영과 거제지역까지 광범위하게 선교활동 지역을 넓혀 나갔다.

호주에서의 휴가를 마친 후 1900년부터는 통영지방을 중점적으로 방문, 순회전도 여행을 시작했다. 당시 부산·거제는 여객선이 운항되고, 일본인 어민들의 이주로 통영지방에 일본인 정착촌이 형상됐다.

그는 수많은 섬들이 있는 통영과 거제지역에 대한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활동의 비중을 점차 넓혀갔다. 그가 통영과 거제 그리고 주변의 섬들을 방문할 때엔 여객선을 이용하기도 하고 개인이 마련한 발동선(통통배)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의 선교활동은 해를 거듭하면서 역동성과 열정이 더해 가기 시작했다. 1905년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목사를 지냈다. 최초의 신자로는 권희순, 김국형, 김낙진, 김찬희, 김학범, 박몽은, 정몽은 등이었다.

아담슨 선교사와 이들은 권희순의 집에서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고 예배처소로 사용했다. 수개월 후 김학범의 집으로 예배장소를 옮기고 1907년 7월엔 김학범을 교회의 영수직분에 세우고 교회의 조직을 갖춘 후 청공교회라 불렀다.

1907년 호주선교부는 김낙진을 순회 조사로 임명하고, 그의 전도로 대화정교회 교인이 된 하강진은 1907년 그의 집에서 미수리 기도소를 개설 했다. 오늘날 미수교회의 시작이다.

그 후 광도면 안정리로 이주한 김낙진은 1910년 그의 집에 안정리 기도소를 개설 했는데 지금의 안정교회이다.

또한 1910년 용남면 장평리 장한조의 집에 기도소를 개설했는데 이것은 지금의 장평교회이다. 그의 선교활동은 지나치리 만큼 매우 열정적이었는데 이는 그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성격은 불같이 급하여 함께 활동한 여선교사들은 이러한 그의 성격과 활동에 적응하지 못해 본국에 편지를 써서 시정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그의 이러한 열정과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는 다음과 같다. 반회리교회(1895년, 양산시, 현 석계교회), 사촌교회(1897년, 함안군), 구영교회(1900년, 거제시), 동항리교회(1902년 통영시 욕지면, 현 욕지제일교회), 서암교회(1905년, 의령군), 대화정교회(1905년, 통영시, 현 충무교회), 연사교회(1905년, 거제시), 양산읍교회(1906년, 양산시), 용소교회(1907년, 의령군), 이목교회(1907년, 의령군), 분계교회(1907년, 의령군), 마장리교회(1907년, 의령군), 배둔교회(1907년, 고성군), 고성교회(1908년, 고성군), 윤외리교회(1908년, 함안군), 상정리교회(1908년, 의령군), 신반교회(1908년, 의령군), 군북교회(1909년, 함안군) 등 모두 2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아담슨 선교사는 1914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영국으로 간 다음해인 1915년 런던에서 소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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