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Live Christ To Die gain" <사는 것이 그리스도…죽는 것도 유익하다>
한국이름 덕배시 조선 선교의 밀알, 최초의 호주 선교사 요셉 헨리 데이비스

1884년 코필드 그래머 스쿨의 초대 교사들과 데이비스 교장(앞줄 가운데)
최초의 호주 선교사 요셉 헨리 데이비스

부산·경남 지방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려는 최초의 노력은 188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The National Bible Society)가 시도한 성경반포 사업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기독교 선교가 금지돼 있었고 활동도 자유롭지 못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두 번째로 시도한 선교사는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존 월푸(John R. Worfe)였다. 그는 1884년 부산을 방문한 후 중국으로 돌아가 쓴 부산 방문 편지가 "국내국외선교"(Missionary Review at Home and Abroad)지 1888년 5월호에 실렸다.

"부산인근 지역은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며 선교사역의 중심지입니다. 내년에는 좀 더 힘차게 일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 합니다. 저는 이곳이 호주교회가 이 이방인들에게 독자적인 선교사를 보내 선교사역을 시작 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라 생각합니다. 이 점은 숙고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한통의 편지가 인도로 가고자 했던 데이비스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그는 1889년 10월 조선에 오게 된다. 

1800년대 조선으로 들어오는 모든 선교사들이 첫 발을 딛는 곳은 부산이었다. 부산은 여객선의 중간기착지로 일본과 인접해 있고 홍콩과 중국대륙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므로 1876년 개항 이래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였다.

당시 부산·경남의 인구는 약 150만 명으로 한양 다음으로 큰 도시로 선교지로서의 중요성이 인식되었지만 왜색(倭色)이 짙다는 이유로 다른 지방 보다 보류되고 있었다.

19세기 말 조선은 외국과의 모든 교류가 단절된 은둔의 나라였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서방국가들과 외교관계가 수립됐지만 여전히 반 외세적 성향이 강했고 선교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호주인 최초로 받은 조선시대(1890년) 여권과 비자. 데이비스는 1889년 10월 2일 한국 땅을 밟았지만 여권 발급시기는 5개월 이후인 1890년 3월 한국 주재 영국 총영사관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헨리 데이비스(Joshep Henry Davies, 1856-1890) 선교사는 누나인 메리 데이비스(Marry T. Davies, 1853-1941) 선교사와 함께 1889년 8월 21일 멜버른을 떠나 같은 해 10월 2일 부산항에 도착 했다.

이들 남매는 부산을 둘러본 후 다시 출항, 4일 오전 11시 제물포(인천)에 도착했고 그 다음날 오후 늦게 한양에 입성했다. 하지만 당시 한양은 이미 선교를 개시한 미국 선교부 외에 또 다른 선교사들이 입국할 전망이었으므로, 데이비스는 바울의 선교 원리를 따라 선교사가 없는 지역으로 가고자 마음을 정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이북 지방으로 가기를 원했으므로 데이비스는 이남 지방으로 가고자 마음을 굳혔다.

1890년 3월 14일 누나를 한양에 남겨둔 채 어학 선생과 하인 그리고 매서할 전도책자와 약간의 약품을 준비, 부산을 향했다.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 수원, 공주, 경상도 내륙지방을 거쳐 하동까지 내려갔다.

그는 20여 일 동안 약 500km에 이르는 긴 여행을 마치고 1890년 4월 4일 금요일 부산에 간신히 도착 했다.

그는 무리한 도보 여행 중 천연두에 감염되고 폐렴까지 겹쳐 도착 전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부산에 도착한 그 다음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안타깝게도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조선에 온지 6개월, 부산에 도착한지 하루가 된 때였다.

당시 부산에 체류하던 캐나다 선교사 게일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시 중구 대청동 뒷산인 복병산에 묻었다.

데이비스의 죽음과 함께 누나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했으나 회복한 후 그 해 7월 18일 멜버른으로 돌아갔다.

빅토리아주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데이비스의 죽음은 크게 세 가지 면에서 호주의 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를 계속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첫째, 그처럼 유능했던 청년 선교사의 갑작스런 죽음은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1890년 5월 6일 멜버른 시내 스카츠 교회(Scots church)에서 거행된 데이비스의 생애를 감사하는 기념 예배에서는 데이비스의 자기 희생적인 모범이 강조됐고, 한국 선교가 중단될 수 없는 사명임을 확인했다. 이것은 곧 빅토리아주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운동에 정신적 기초를 제공했다.

둘째, 친목과 교제를 위해 시작된 청년연합회로 하여금 선교사를 파송하는 조직체(Missionary sending organization)로 확고한 기틀을 세워 주었다는 점이다.

1891년 존 멕카이목사(Rev. J. H. Mackay) 부부를, 1894년 앤드류 아담슨목사(Rev. Andrew Adamson) 부부를, 1902년에는 커렐 의사(Dr. H. Currell) 등을 파송하면서 한국 선교사를 파송, 지원하는 운동을 계속했다.

셋째, 한국선교를 위한 또 다른 조직으로서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PWMU, 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 조직의 동기를 부여했다.

한국에서 본국으로 돌아온 메리 데이비스는 한국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음을 말하고 이때야말로 선교를 시작할 적기임을 강조하는 한편, 한국선교를 지원하는 사람을 위해 써 달라고 50파운드를 기증했다.

또 이 당시 데이비스의 동생 사라는 발라랏에서, 그리고 데이비스의 동생 존 데이비스의 부인은 질롱(Geelong)에서, 하퍼부인(Mrs. Harper)은 멜버른시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선교운동의 조직화를 위한 어떤 조직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일련의 움직임이 함께 어우러져서 1890년 8월 25일 정식으로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사실은 이 연합회가 데이비스의 가족들에 의해 발의되었다는 점이다. 이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는 처음부터 선교운동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고, "여성들에 의해서 여성들을 선교하는 단체"(Mission work among women by women)임을 분명히 했다.

그 결과 PWMU는 1891년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그리고 파우셋(Miss Mary Fawcett) 등 3명의 미혼 여 선교사를 시작으로 약 40여 명의 여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 크나큰 공헌을 남겼다.

마치 캐나다의 독립 선교사였던 멕켄지의 죽음으로 캐나다장로교회(후에 캐나다 연합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했던 것처럼,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의 시련은 그치지 않았고 풍토병과 열악한 환경이 이들을 괴롭혔다.

멕카이 목사 부인 사라(Sara)는 부산에 도착한지 3개월 만에 폐렴으로 사망, 호주장로교 파송 조선 선교사의 두 번째 희생자가 됐다.

이들은 지금의 동구 좌천동 686번지에 거주 했다. 바로 이곳이 호주 선교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멘지스에 의해 한강 이남의 최초 여학교인 일신 여학교가 설립 되면서 지방의 인재들을 길러내는 산파 역할도 시작됐다.

이렇게 출발된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은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지방 선교를 확대해 나가면서 1891년 부산지부에 이어 1905년에는 진주, 1911년에는 마산, 1913년에는 통영과 거창에 선교지부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여성선교사들의 수가 많았는데 이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의 '장로교여전도연합회'(PWMU)가 파송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 여성 선교사들의 역할은 괄목할 만큼 컸다. 특히 교육과 사회복지, 여성의 사회활동 그리고 항일민족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는 성경의 말씀을 되새겨 보며 통영지방의 근대화와 호주선교사의 역할에 대해 2016년 11월부터 현재까지 30회에 걸쳐 실었던 글을 오늘로서 마감하고자 한다.

귀한 지면을 할애 해 주신 한산신문 관계자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끝>

근대문화의 효시, 통영 호주선교사의집 복원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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