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라히리의 책 두권, 정은주 (통영시 광도면 죽림)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작가는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에게 모국어는 무엇인지, 언어의 불완전, 불안정성을 느끼며 어느 날 여동생과의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한다. 피렌체에서 일주일간의 시간은 낯선 도시의 느낌이 아닌 친숙함을 느끼게 된다. 우연히 만난 이탈리아는 내 안. 빈 공간 그곳에 이탈리아어를 편히 자리 잡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탈리아어와의 운명이 시작되었다.

작가는 여행에 앞서 안내서가 아닌 포켓 사전을 구입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사전이 한 작가의 인생이야기로 연결된다.

새로운 언어를 접하는 이에게, 사전이란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화수분 같은 존재이다. 하나의 단어를 통해 같은 뜻의 단어를 찾고 그 단어를 곱씹으며 암기하고, 적어둔다. 사전에서 만난 단어들을 통해 새로운 길로 이끌어준다는 것을 경험한다.

단어를 습득한다고 해서 언어의 모두를 가질 수는 없다. '언어를 배우고 결속감을 느끼려면 완벽하지 않아도 대화를 먼저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외국어를 습득하고자 학원을 다니고, 독학을 하고, 책만 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행위들이 언어를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화를 나누고, 글쓰기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비로소 그 언어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이 단순하지 않다는 건 경험해 본 이들은 알 것이다. 작가는 그 고된 시간을 쉽게 공감할 수 있게 적어두었다. '단어 대부분이 공중으로 증발되고 줄줄 새어 나간다', '모국어는 첫째아이, 외국어는 둘째 아이', '그 아이들을 엄마로서 키운다' 등의 문장들을 보면서 재미와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외국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벽은 있었다. 친구의 격려와 조언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몫(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일종의 도주로 시작했던 이탈리아어 글쓰기가 스스로를 변하게 하였고, 거의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고 작가는 말했다.

작가는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글쓰기를 놓치지 않았다.

'독서에 대한 반응, 대답. 일종의 대화', '로마에서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는 건 여기에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유일한 방법', '삶을 흡수하고 정리하는 내 유일한 방법' 등의 많은 이야기를 통해 작가에게 글쓰기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작가는 이탈리아어 글쓰기를 통해 이탈리아어와 하나가 됨을 느끼고, 존재의 이유를 느낀다.

또한 벵골어와 영어 사이에서 느꼈던 이민자의 혼돈,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책은 언어를 배우는 일. 그 자체를 말해줬다. 언어가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니었다. 언어에는 문화와 역사가 기반이 되어 있고, 언어를 통해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변신의 기회가 되고, 스스로에게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작은 책은 단순히 언어의 집합, 모음집이 아니었다. 담겨진 언어의 세계를 읽고, 해석함으로서 나를 확장할 수 있게 해주었다.

책이 입은 옷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기를 보낸 작가는 주변 친구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싶었지만, 벵골 여자가 되기를 원하는 어머니의 강요로 옷에 대해 옷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뚜렷한 결과가 없는 엄마와의 다툼을 거치면서 우리가 입는 옷이 언어나 음식처럼 정체성, 문화, 소속을 표현해준다는 걸 피부로 느꼈고, 입는 옷이 내가 어디 있든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걸 어려서부터 배웠던 작가가 쓴 '책이 입은 옷' 은 남달랐다.

라히리는 어린 시절부터 서로 다른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랐기에 이 갈등에서 자유로워지려 했지만 작가로서 늘 숙제로 남아있었다. 서로 다투는 정체성을 완벽하게 반영해주는 것이 라히리에게는 책 표지였다. 작가가 된 이후로 출판사에서 라히리의 출신과 외모로 인도를 연상시키는 표지를 하는 걸 보면서 작가의 내면, 책 내용보다는 겉모양에 치중하는 현실을 보며 느꼈던 안타까움이 책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래서 라히리에게 책 표지는 자신과 동일시하는 게 당연했다.

작가(책)과 예술가(표지)사이의 의사교환이 완벽하게 조응하길 바란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책 표지는 단순히 책의 의미나 내용을 반영하기보다는(물론 아닌 경우도 많다) 상업적 목적이 커서 표지가 책의 성공 혹은 실패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라히리는 도서관에 있는 발가벗은 책 이야기를 꺼낸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표지가 쉽게 파손된 책들을 보면서 표지보다는 책 내용, 작가의 말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상할 수 없고 참조할 것 없는 자유로운 독서를 가능케 하는 미스터리, 라히리는 발가벗은 책을 통해 순수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해준다.

완벽한 표지는 존재하지 않고, 표지 대부분은 우리의 옷처럼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 결국 작가는 책이다. 책에 활력을 주기 위해, 책을 좀 더 현실감 나게 하기 위해 표지를 입어야 한다. 새로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는 것은 바로 원래 언어로 적혀진 오리지널 텍스트다.

줌파 라히리의 산문집 두 권은 책을 아주 많이 사랑하는 언니가 내게 조언을 해주는 듯 했다. 책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책을 고르고, 읽는다는 것은 독자에게 즐거움일 수도 있다. 그 즐거운 일을 하는데 있어 작가의 말을 독자가 있는 그대로 봐달라는 라히리의 부탁이기도 했다.

당신과 내가 만나기 전, 연인이 될 지 안 될지도 모르는 그러한 설렘으로 책과의 인연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