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천재예술가의 짧은 생은 마흔 비극으로 끝났지만
통영에서의 예술가 이중섭은 그림 속 따뜻한 풍경으로 영원하리라

이중섭의 대표작이 탄생한 옛 나전칠기 기술양성소. 맨 뒷줄 좌측에서 우측으로 1. 심부길 끊음질 무형문화재 3. 연구부학생 4. 구복조 통영출신 연구원 나전부 강사 5. 임성춘 연구원 칠부 강사.서계문 통영칠공회사대표(1945년 이전명칭: 통영공업전수소. 최초 '나전칠기 양성소'로 사용) 오른쪽 맨 끝 하성은 이론강사, 가운데 줄 좌측에서 우측으로 1. 김성수 강사 현 통영옻칠미술관 관장 8. 김영호 공예협종조합연합회 회장 부산통영칠기사 대표 10. 김봉룡 부소장(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13. 홍순대 옻칠기능자 겸 부산국제시장 '나전칠기 옻칠재료 및 나전재료상회' 경영 14. 김종남 통영에서 나전칠기 상점 경영.(사진제공=김일룡 문화원장)
이중섭이 기거했던 옛 나전칠기 기술양성소의 현재 모습

비운의 천재 화가 이중섭(1916-1956)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미술가이지만 한국의 고흐라 불릴 만큼 그의 생애는 슬프기만 하다.
가난과 배고픔으로 얼룩진 41년의 생애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이중섭은 한국 문화계 '살아있는 신화'가 됐다.

천재 화가의 짧은 삶 속에서도 이중섭의 예술세계에 있어 통영은 엄청난 안식처이자 창작의 활화산이 됐다. 이중섭이 1950년 12월 국군 철수를 따라 가족들을 거느리고 원산항을 떠나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 생활에 이은 제주도 서귀포 생활(봄에서 12월까지)을 거쳐 통영에서 한 겨울을 지냈던 것은 1953년의 일이다.

다음해 봄에 끝나는 이 길지 않는 통영 시절이 이중섭의 예술을 위해서 귀한 시절로 남았다.

그가 남긴 걸작의 상당한 부분은 잔잔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름나 있는 통영에서 제작됐다.

통영은 이중섭이 1953년 겨울~1954년 봄이라는 짧은 기간 거주했지만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흰소, 황소, 달과 까마귀, 부부, 가족 등 그의 대표작들을 창조해낸 곳이다.

한때 통영시가 미술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통영풍경 등 이중섭 그림 속 통영풍경을 찾아 관광명소화 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 이중섭 거주지와 작품 활동지 등에 미술관 또는 기념관 등을 추진, 테마 관광지로 발전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탄생 100년 하고도 2년이 더 지난 지금, 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통영에서의 이중섭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그 한국근대미술사의 한 위대한 유산을 찾아가보자.


이중섭이 1950년 12월 국군 철수를 따라 가족들을 거느리고 원산항을 떠나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 생활에 이은 제주도 서귀포 생활(봄에서 12월까지)을 거쳐 통영에서 한 겨울을 지냈던 것은 1953년의 일이다.

다음해 봄에 끝나는 이 길지 않는 통영 시절이 이중섭의 예술을 위해서 귀한 시절로 남았다.

그가 남긴 걸작의 상당한 부분은 잔잔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름나 있는 통영에서 제작됐다.

통영의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교육 책임자로 있던 공예 미술가 유강렬의 권유가 이중섭에게 모처럼의 생산적인 한 계절의 시간을 선사했던 것이다.

한 해 전 그리움이 사무쳐 선원증으로 건너간 일본에서의 일주일이 아내와 아이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돌아온 이중섭은 가족이 있는 일본과 가까운 통영으로 이사해 왔다.

그는 유강렬이 제공하는 침식(항남동 구보건소 옆 일명 빕스 건물)에 기대어 오랜 만에 그림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옛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은 현재 경남 통영시 항남동에 있으며, 개인이 소유하면서 식당과 주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초 신축 시기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이며, 부지 258㎡에 지상 2층 규모로, 나무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놓아 기와로 지붕을 만드는 기법인 목조와즙으로 지어졌다.

이후 민간과 옛 통영군이 번갈아 가며 운영해오다 경남도가 인수해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란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운영을 맡은 것은 1951년 8월. 이 건물은 그 뒤 다시 민간과 옛 충무시가 잇달아 운영하다 결국 1975년 폐지됐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 온 공예예술인을 중심으로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정신으로 체계적으로 운영됐고 홍익대 공예학부를 만든 유강렬,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장윤성, 일본에서도 칠예가로 명성을 떨친 강창원, 나전칠기로 인간문화재가 된 김봉룡 선생 등 최고의 강사진으로 양성소가 운영됐다.

이중섭과 초정 김상옥도 가끔 특강을 하는 등 명실공히 한국 근·현대 공예예술의 산실로 자리 잡았었다.

특히 이중섭 화가의 경우 지인 유강렬을 비롯 김기섭 당시 충무시장과 달구지로 장독을 실어나르던 통영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 유치환, 전혁림, 박생광 등과의 교류와 후원으로 이 곳에서 그의 대표작 달과 까마귀, 흰소 등 2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가슴 아픈 허전함을 이중섭은 새로 맞이하는 통영의 풍경으로 달래면서 그림에 열중했다.

그 해 바로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와 그 유명한 '흰소'가 탄생했다.

그 '황소' '부부' '가족' '달과 까마귀' '도원'같은 대표작들도 모두 통영 시절의 작품이다.

겨울이 지나자 통영 일원 나들이를 즐기며 풍경화 제작에 몰두하여 '푸른 언덕'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충렬사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 등 가작을 남기기도 했다.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인 이중섭은 항남동 성림다방에서 4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 작품으로는 풍경화가 주종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때 청마 유치환이 전시회장을 찾았다. 통영 출생인 청마는 이중섭 보다 여섯 살 위다.

청마의 눈길은 뜻밖에도 이색적인 '달과 까마귀'에 쏠렸다.

성림다방 이층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이름 없는 만남이 이중섭 사후 11년 만에 '怪變-이중섭李仲燮 화畵 달과 까마귀에'(현대문학, 1967년 2월호)라는 한 편의 시로 영글게 됐다.

저걸 보라
어서 나와들 저걸 보라
검은 장속裝束한 사교邪敎의 망자亡者 같은 한 떼
새들은
가까운 전선줄 위에 이루 죽지를 부딪고 놀라 모여
전무후무前無後無 저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저 가증스런 해와는 또 다른
한 발만큼이나 커다란, 커다라면서도
야릇하게 차가운 빛을 던지는 황황함에
경악과 불신不信의 가위같은 부리, 유황빛 눈을 휩뜨고들
노호하며 다투는 변괴!

아 저 해라는 것,
그 혁혁한 세력과 오만스런 엄위로써
저들이 존재를 여지없이 추달하던 저 해를
증오와 저주로서 서산西山 저쪽 넘어뜨리고
이제야 그지없이 평화한 죽음의 흑암 세계 속에
오관五官마저 거부하고 길이 안주安住하려는데
난데없이 저것은,
한 발만큼이나 커다란,
저게 무언가?
저건 또 무어라 말인가?

건너 어두운 등성이,
검은 침엽수들의 고요로운 가장자리 위로
난데없이 사자死者의 사면死面 같은 차가운 얼굴을
내밀고
휘황히 나타난 저것은.

아아, 원만 무결한지고!
바야흐로 앞산 마루를 넌지시 벗어나온
만만滿滿한 만월滿月을 앞에 하고
그러면서도 사자死者의 사면死面 같은
차거운 빛을 휘황야릇하게 던지는 저것은
짐짓 무선 의미意味의 괴변怪變인가?
무엇을 혼령들에 추달하련건가?

꽃의 시인 대여 김춘수도 '이중섭'을 노래했다.

저무는 하늘
동짓달 서리 묻은 하늘을

아내의 신발신고
저승으로 가는 까마귀

까마귀는
남포동 어디선가 그만
까욱하고 한번만 울어버린다.

오육도를 바라고 아이들은
돌팔매질을 한다.

저무는 바다
돌 하나 멀리멀리
아내의 머리 위 떨어지러라.

'이중섭 1'이라는 시다.

김춘수는 이중섭을 시리즈로 4편의 시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1951년 봄 피난지 서귀포의 방벽에 붙어 있던 것을 조카 이영진씨가 암송해 전해진 것이다.

1953년 2월 초정 김상옥 선생의 시집 의상(衣裳) 출판기념회에도 가난한 화가 이중섭은 축의금 대신 그림으로 축하했다.
 

꽃으로 그린 악보로 탄생한 이중섭의 축하그림


닭 한마리가 꽃 한송이를 물고 있고, 오른편에는 게와 꽃잎이 그려진 그림이다. 초정은 이중섭에게 받은 은박지 그림을 소재로 '꽃으로 그린 악보-화제畵題'라는 시로 화답했다.

막이 오른다. 어디선지 게 한 마리가 기어 나와 거품을 품는다. 게가 품은 거품은 공중에서 꽃이 된다. 꽃은 복숭아꽃, 두웅둥 풍선처럼 떠오른다.

꽃이 된 거품은 공중에서 알보를 그리다 꽃잎 하나하나 높고 낮은 음계, 길고 짧은 가락으로 울러 퍼진다. 소리의 채색! 장면들이 옮겨 가며 조명을 받는다.

이때다. 또 맞은편에서 수탉 한 마리가 나타난다. 그는 냄새를 보고 빛깔을 듣는다. 꽃으로 울리는 꽃의 음악, 향기로 퍼붓는 연주-

닭은 놀란 눈이다. 꼬리를 치켜세우고 한쪽발을 들어올린다. 발가락 관절이 오그라진다. 어찌 된 영문이냐? 뜻밖에도 천도복숭아 가지가 닭의 입에 물린다.

게는 연신 털난 발을 들고 기는 옆걸음질, 거품은 꽃이 되고, 꽃은 음악이 되고, 음악은 복숭아가 되고, 그 복숭아를 다시 닭이 받아 무는-

저 끝없는 여행! 서서히 서서히 막이 내린다.

천재 예술가의 짧은 생은 마흔살 비극으로 끝났지만, 통영에서의 예술가 이중섭은 그의 그림 속에, 교류했던 통영예술가들의 작품 속에 따뜻한 풍경으로 영원히 남았다.

더 이상 위대한 예술가의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이제 우리가 이중섭을 기억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통영에서의 이중섭, 대한민국 예술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임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위대한 예술가-이중섭은 가고 없지만 그의 예술혼은 이 통영 속에 영원하리라.

통영풍경
충렬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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