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계속 앨리스 '이야기'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사실 캐럴의 앨리스 책들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동화라 불리는 하나의 거대한 환상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도덕이나 감정에서도 자유롭고, 보통의 동화들과 달리 선악의 구분도 작동하지 않으니까요. 일관된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다양한 형태의 모순, 언어유희, '난센스'가 연이어 등장할 뿐입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대부분 '다른' 물리적 법칙이 적용되는 왜곡된 논리의 언어유희로 구성됩니다."

작곡가 진은숙 선생이 한 말입니다.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구상하고 공연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원받고자 독일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크리스토프 알브레히트 극장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지요. 진은숙 선생은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앨리스가 경험한 세계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꿈속에서 경험한 환상적인 세계와 놀랍도록 비슷하다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루이스 캐럴이 제가 100년 후에 꿈꾸게 될 것들을 미리 묘사해놓은 것 같았습니다."

진은숙은 오페라 작곡에 앞서 실험적인 작품으로 소프라노와 앙상블을 위한 'snagS & Snarls'를 작곡했습니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몇 차례 공연된 일이 있고, 소프라노 서예리 선생이 공연용 소품으로 준비했던 채찍과 수갑과 경찰 모자 등은 공연장에서뿐 아니라 공항 보안검색대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고 하지요. 지난해에는 롯데콘서트홀에서 오페라가 초연될 뻔했다가 예산 문제로 주요 출연자를 위한 모음곡 형태로 발췌 공연되었고, 또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퍼즐 & 게임'이 독일 쾰른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유래한 여러 작품 가운데 '퍼즐 & 게임' 모음곡이 소프라노 황수미 협연,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연주로 통영국제음악제에서 공연될 예정이지요. 이 글이 인쇄 매체로 나올 때쯤이면 공연을 불과 며칠 앞둔 상태일 듯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통영국제음악제를 앞두고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이 작품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기도 하네요.

'퍼즐 & 게임'의 가사는 말장난으로 가득해서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 의미 없거나 애초에 번역 불가능한 가사로 되어 있거나 합니다. 그리고 말장난 가득한 노랫말에 작곡가가 입힌 음악은 '음 장난'으로 가득합니다. 소프라노가 노래하는 선율은 때로 귀에 쏙 들어오는 매력이 있으면서도 어딘가 이상하게 비틀려 있습니다.

그리고 '음 장난'의 백미가 오케스트라 소리에 담겨 있습니다. 무지갯빛 반짝반짝한 소리 알갱이가 통통 튀고 둥둥 떠다니고 데굴데굴 구르고 해요.

그런데 진은숙 작곡가가 한국 음악계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결과로 겪었던 부조리한 일들은 루이스 캐럴보다는 차라리 프란츠 카프카 소설을 연상시킵니다. 이미 뜻있는 분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그 부조리함을 비판했고, 저도 이참에 한 마디 보탤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진은숙 선생의 이 멋진 음악이 머릿속을 맴돌고 그냥 음악 얘기나 해야지 싶어져서, 엉뚱하지만 그냥 아래 두 마디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반달리즘이란 고대 로마의 문명을 파괴한 게르만족 일파 반달족에게서 따온 말로, 문화나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세계 정상급 예술가에게 "장기 집권한다" "돈을 못 벌어 온다"고 타박해 내쫓는 행위를 칭하기 위해 반달리즘만큼 어울리는 말도 없다" (경향신문 백승찬 기자)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과 권력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다. 하지만 나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가진 행복한 사람이다. 내 일에서 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나의 삶을 내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리고 든든한 가정과 진실한 친구들이 있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나는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다" (진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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