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의 시작은 한산도가 아니라 미륵도다. 대첩 전날 조선수군은 미륵도 당포에 주둔해 있었다. 지금 삼덕이라 불리는 곳이다. 왜군이 견내량에 정박해 있음을 알린 건 미륵산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고 있던 목자 김천손이다.

첩보를 바탕으로 척후를 마친 조선수군은 1592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와 미륵도 사이 바다에서 왜적을 대파한다.

당포에는 지금 당포성이 남아 그날의 역사를 증거 한다. 당포성은 1485년(성종 16)에 만들어졌다.

이미 세종 20년인 1438년에 고성 하일면에 있던 진영을 옮겨 당포 만호진을 설치하였다.

한산대첩 이전에 조선수군은 당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6월 2일 당포에 주둔해있던 왜군을 급습하여 적선 21척을 격파하였다.

이날의 전투는 곧이어 당항포해전으로 이어진다.

패한 왜군이 당항포로 이동했다는 첩보를 접수한 수군은 당항포로 치달린다. 왜군들은 치를 떨었다.

가는 곳마다 신출귀몰한 조선 수군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당항포에서는 적선 26척이 괴멸당하였다.

왜군은, 이 땅과 이 바다가 조선 백성의 것이라는 걸 놓치고 있었다. 소치는 사내 김천손이 왜군을 한산대첩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갔듯, 당항포의 악몽은 이 지역 토병인 강탁의 첩보에서 시작되었다.

"어제 패한 왜적들은 죽은 왜놈의 머리를 많이 벤 후 한 곳에 모아 불태우고는 그 길로 육로로 갔는데, 길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도 죽일 생각도 못하고 통곡하면서 돌아갔으며, 그날 당포 바깥 바다로 쫓겨난 왜적의 배들은 거제도로 향해 갔습니다"

백성들과의 협력과 소통이 없었더라면, 세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의 대첩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이 부분은 역사가들조차 잊은 대목이다.

전투는 군대가 하지만, 전쟁은 온 나라가 한다. 지금껏 임진왜란사는 평면 위에 그려졌다. 아군과 적군이 남해안 앞바다를 누비는 2차원적 해석이었다.

여기에 조선의 백성이라고 하는 제3의 차원이 포함되어야 한다. 언덕마다 하얀 옷 입은 사람들이 왜적의 이동경로와 조왜 전투를 목격 또는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군에게 물길을 열어주고, 물때를 알려주었다. 이런 활동들을 놓치지 말아야 역사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바야흐로 남과 북은 휴전협정을 종전협정으로 대체하고, 상호 교류 협력하면서 진정한 평화시대를 열려고 한다. 협상은 정부가 주도하지만, 새 시대를 열어젖히는 것은 오롯이 국민의 몫이다. 이 산하의 주인이 목청껏 포효해야 한다. "오라 평화여, 가자 통일로!"

저자 주. 당포성의 유래는 김일룡 통영시 문화원장님의 향토사 강의에 기초하였습니다.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