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 보다 더 멋진 통영을 위하여

최근 가족여행으로 오스트리아와 동유럽을 다녀왔다.

오스트리아 비인은 로마군대의 주둔지로 형성되고, 합스부르크왕조의 6백년 수도였다.

우리에겐 ‘음악의 도시’로 알려졌으며, 현대엔 자동차부품산업을 포함 산업도 균형을 갖춘 부러운 선진국의 알짜, 수도로 여겨졌다.

여행을 떠나기 전 감상한 영화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와 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덕분인지 비인은 나찌의 유태인 학살이 유인 된 곳으로 강렬하게 임펙트 돼 있었다.

비인과 함께 떠오르는 영상은 늘 이웃으로 지내다 어느 시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태인 이웃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그 동네 사람들의 눈동자이다.

여기에 더해 역사가들이 말하는 오스트리아는 프랑스혁명의 계몽과 자유정신에 반하는 보수반동의 아성이었으며, 1차 세계대전과 함께 20세기 파괴와 대량 살육의 세기와 함께한 암울한 곳으로 나에게 재설정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모짜르트가 이곳에서 활동하고 이곳에 묻혀 있는 건 오스트리아 뿐 아니라 서양사람 모두에게 위안이다.

여행을 준비하며 35세에 운명한 모짜르트도 죽음 당시엔 그의 시신이 마대자루에 실리는 허망한 삶이었다. 그가 시대를 앞서 간 음악 천재로서 평가되기 시작 한 것은 그의 영면에 든지 100년이 지난 뒤 였다.

여행지 중 모짜르트 생가가 있는 짤즈부르크는 말할 나위 없고, 알프스산들과 볼프강호수에 접한 짤츠캄머굿엘 가보면 모짜르트 어머니의 고향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흥분하고 자랑스럽게 도배돼 있다.

비인에 도착한 날, 윤이상 선생님의 유해의 이장절차가 베를린 카토우공원에서 진행된다는 뉴스를 접하고는 온통 윤이상 선생의 생각뿐이었다.

우리에겐 다시없는 좋은 반성과 인식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기쁜 소식을 접하고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된 이라는 수식을 부쳐 위대한 음악 천재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불편함이 있는 건, 냉전 시대 독재자의 잔영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건지 모를 일이다.

통영사람은 힘들고 귀찮더라도 <동백림사건>이 아닌 12자를 추가해 <중앙정보부에 의한 동베를린 간첩단 조작사건>으로 표현해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주체가 명백하게 분류해야 한다.

현대음악의 세계적 거성으로 빛나는 위인이 고향사람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자부심을을 가져야 한다.

객지에 나와 음악적 성공을 거두고 늦깎이 유학길에 올라 동향 사람으로 세계적 업적을 이룬 그의 성과를 칭송하기 전에 우리는 여느 음악가와 다른 예술적 생애와 인간의 길을 걸어 온 그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기를 기대한다.

“나는 (동베를린사건)으로 생사의 경계를 넘어선 뒤 인간 생활에서 어디까지 정치이고 어디까지가 정치가 아닌지, 그걸 단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치 아닌 것이 거의 없습니다. 진정한 인간문제, 사회문제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돌보지 않고 힘을 쏟는 것. 이것은 마땅히 인간이 해야 할 일이고, 또 가장 인간적인 의무라 생각합니다. 나는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내 음악도 지금은 그런 내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 / 서경석의 서양음악순례 재인용)

통영은 이순신 장군의 구국의 혼이 깃든 곳이고, 이경준 통제사 이래 통제영 문화가 통영의 물적 토대를 형성한 것 사실이다. 400년 유서가 도시 곳곳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통제영 물적 토대가 400년 통영사람들을 먹고 살게 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절실히 생각해야 하는 건 보이는 유산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 남긴 충정의 기억이다.

삭탈관직 당하고도 백의종군해 백성을 대하는 인간적 고뇌를 가진 지도자, 인간의 길을 걸어온 이순신의 삶으로 우리는 깊이 빠져들고, 사랑하게 된다.

그런 위인을 우리는 또 가지고 있다. 나는 이순신과 윤이상이 성실한 통영사람의 면모로 우뚝 서길 기대한다. 상처받은 용으로 베를린 차가운 땅에 묻혔던 선생의 유해가 통영에 도착했다.

따뜻한 봄날 그를 고향사람이 위로해주고 사랑해야 한다. 배를 타고 가다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소리를, 어부의 노랫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고, 미래사 편백나무 숲 바람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을까?

돌아가시기 전 윤이상은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충정은 변함없습니다” 그 충정에 답해야 한다.

재경통영중고동창회장으로 시내에 몇 개의 펼침막을 걸고 했던 것은 객지에 살고있는 고향 사람으로 안타까움의 몸짓이며, 아울러, 그간 윤이상 선생님을 보살 핀 베를린 시민에게 세계시민의 예의와 통영인다운 염치로 그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아가 나비처럼 꿈을 이어 간다면 베를린이 20세기 독일민족의 통일을 증거한 곳이고, 베를린의 온기를 통영사람들이 이어 남북분단의 장벽을 철도로 뚫고 한반도를 넘어 유라시아 대륙으로 평화와 통일의 위대한 한민족의 기개를 베를린까지 다시 옮겨내는 첫 시발역이 통영이면 어떨까? 통영사람이 움직일 때 통영은 전 세계에 반짝반짝 빛나는 진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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