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 지난 1일 타계…통영시민장 마지막 길 배웅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나한테 참말로 잘못했다. 한마디만 해 달라. 그러면 나는 편히 눈을 감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갈 수 있겠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실상을 알리는데 앞장 서 온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의 영결식이 지난 3일 오전 10시 충무체육관 시민분향소에서 엄수됐다.

충무실내체육관에 마련된 김복득 할머니의 분향소.

오전 9시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 장례식장에서의 발인에 이어 운구행렬이 시민분향소에 도착, 영결식이 열렸다.

이날 유족, 시민단체를 비롯, 할머니를 추모하는 시민 50여 명 참석, 엄숙한 분위기 속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영결식은 조사와 '시조창' 추모 공연, 유족 헌화 등 순서로 진행됐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 시민모임 송도자 대표는 조사를 통해 “고국에 돌아온 어머니는 모두가 홀시하고 냉대하는 고통 속에서 70년의 세월을 살아내야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셨다”고 말했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송도자 대표의 조사모습.

송 대표는 “어머니의 소원은 오로지 자신의 인생을 돌려주는 일본의 사죄 한마디였다. 일본 정부의 사죄 한마디를 듣기 위해 무수한 집회와 언론 인터뷰, 생존자 발언으로 외쳐오셨다. 어머니는 서툰 걸음을 걸어오셨다. 하지만 어머니가 걸어오신 길은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길이었다”며 “어머니는 피 같은 돈을 아껴 아이들의 꿈이 좌절되지 않도록,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기금도 내놓으셨다. 오늘 이 자리에서 어머니의 걸음과 귀하신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잊혀지지 않도록,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발걸음과 역사를 우리 모두 기억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추모 공연 후, 유족들은 헌화를 올리며 마지막 인사를 드렸고, 시민들도 할머니의 영정 아래 헌화하며 추도했다.

김복득 할머니의 유해는 통영시립화장장에서 화장 후 통영시 용남면에 있는 두타사에 안치됐다.

김복득 할머니는 1918년 통영 태평동에서 태어나 1939년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강구안에서 배에 태워져 부산으로 간 후 배를 타고 중국에 도착, 대련에서 3년, 다시 필리핀에서 4년간 후미코란 이름으로 지옥과 같은 일본군 ‘위안부’생활을 강요당했다.

해방 무렵 군함을 타고 우여곡절 끝에 고향땅 통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94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로 신고·등록한 할머니는 2003년부터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과 함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섰다.

8.15 광복절 특별수요시위 참가, 언론사 인터뷰, 일본나고야 증언집회와 교류회에도 참가 하는 등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또한 2012년 근검절약으로 모은 재산 일금 2천만원을 통영여자고등학교에 장학 기금으로 기부, 2013년에도 경남일본군‘위안부’역사관(가) 건립에 위해 그동안 아껴 모은 2천만원을 건립기급으로 기부하며 아름다운 마음을 전달했다.

2014년 김복득 생존피해자 일대기 ‘나를 잊지 마세요’ 영어판을 UN 및 세계 각국으로 발송했고, 영국로이터통신 인터뷰로 세계에 보도됐다.

생존 피해자 가운데 두 번째 고령자였던 김복득 할머니는 그간 지병 등으로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지만 101세의 일기로 지난 1일 새벽 눈을 감았다.

김 할머니의 별세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7명으로 줄었다.

김복득 할머니의 영정이 분향소로 입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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