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메인박스 칼럼
최광수의 통영이야기 172 - 그 통제사에 그 장수

정량동 비석골에서 주전골 넘어가는 길을 가다 보면 염언상 장군과 그의 가족묘를 만날 수 있다. 묘는 기와 담으로 둘렀고 문은 굳게 닫혀 들어갈 수 없지만, 우뚝 선 비석의 글귀 [선무원종공신염공언상사적비]는 먼발치에서도 선명하다.

염언상 장군은 전남 보성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에 뛰어든다. 6품 벼슬에 이르렀으나 뜻에 맞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순천에서 자연을 벗 삼아 지내던 그를 전장으로 불러낸 이는 이순신 장군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참모가 되어 옥포해전과 한산대첩에서 큰 공을 세워 종 4품 훈련원 첨정을 제수받기도 한다.

1597년 2월 이순신 장군이 삭탈관직당하고 의금부로 압송되자 고향 보성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5년 가까이 이순신 장군을 모셨던 의기와 용맹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둘째 아들 염응탁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도원수 권율 장군 휘하에서 전쟁을 계속한다.

하동 땅 악양 전투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고,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함께 의령과 함안의 왜적을 막아내었다. 이후 방어사 이옥을 도와 추풍령을 지키며 많은 공을 세웠다. 9월 16일 벌어진 명량대첩 소식을 전해 들은 곳도 추풍령이었다. 한산도에서 헤어진 이순신 장군의 기적 같은 승리 소식에 염언상 장군은 목놓아 울며 기뻐하였다.

남해의 승전 소식에 다시 한번 떨쳐 일어났던 장군은 명량대첩 1주일 뒤인 9월 23일 ‘추풍령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46세였다. 전쟁이 끝나고 선무원종2등훈에 추서되고 통훈대부군자감정(정3품 당하관)으로 품계를 하사받는다. 철종 12년(1861년)에는 다시 통정대부병조참의(정3품 당상관) 품계를 받는다.

한산도 앞바다를 누비던 장군의 뜻은 고스란히 그의 무덤과 함께 통영의 역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의 후손들은 통영으로 이주하였고, 대대로 통제영의 무관을 역임하여 지역에서 아주 유력한 군관 가문을 형성하였다.

추풍령에서 순국하신 분의 묘가 통영에 있는 게 의아했는데, 장군의 시신을 찾지 못한 후손들이 장군의 옷을 묻어 장사 지내면서 통영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임란을 맞아 조정은 무능했고,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군은 조선 백성을 수탈하고 괴롭히는데 왜군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하늘 아래 누구도 나누어지지 못할 외로움과 고독을 지고서 전장에 임했다. 그가 믿을 것은 휘하의 장수와 병사들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장수들과 이름 없는 병사들과 그들을 믿고 따르며 물길을 열어준 바다 마을 백성들을 기억해야 한다.

염언상 장군의 묘는 그 기억의 한 자락을 열어준다.

한산신문  hannews@chol.com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산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