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절 특집

1951년 4월 27일 임진강 유역 중부전선 전투에서 실종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김정권(金正權) 2등 중사. 바로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제6대 학장을 지낸 김형진 기계시스템공학과 교수의 아버지이시다. 당시 김 중사 나이 꽃다운 24세. 김 교수 나이가 첫돌도 맞이하지 못한 때였다. 가족의 간절한 기도 끝에 지난 7월 5일 김 교수 가족은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반이 99.999% 일치하는 유골을 찾았다는 전갈이었다. 가족들이 숙명처럼 그리워하였던 분,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68년간이나 파주 광탄면 박달산 기슭에 외롭게 묻혀있던 아버지가 부활했다는 기적이다. 13만 3천192명의 실종자 중 유해 수습 1만 1천372명. 그 중 유전가가 일치해 가족의 품에 안긴 129번째의 기적이다. 확률로 설명할 수 없는 김형진 교수 가족과 아버지와의 조우는 오는 24일 예정돼 있다. 조국을 위해 장렬히 전사한 호국의 영웅 김정권 중사의 집으로의 귀환식과 대전 현충원 봉안식이 국방부 주관으로 엄수된다.

이에 한산신문은 8.15 광복절을 맞아 김정권 2등 중사의 6.25 참전부터 68년만의 귀환에 이르는 가족의 간절한 기다림과 기적 같은 귀환을 김형진 학장의 특별기고를 통해 직접 들어본다. <편집자 주>

김형진 교수의 아버지 故 김정권 2등중사의 유일한 사진.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故 김정권(金正權) 2등중사는 1928년 경북 의성군 다인면 덕지리 148번지에서 4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어머니는 일본 교토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준비 중인 학생이었다. 1945년 종전으로 부모님을 따라 귀국한 17세의 어머니는 한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1946년이었다.

저녁이면 한국어를 가르치는 시아버지와 양반의 내실 법도를 중시하는 시어머니와 표현은 서툴지만, 속이 깊었던 19세의 남편과 함께 대가족 사이에서 조금씩 적응하고 계셨다. 나는 1950년 7월 5일에 태어났다. 6.25 전란이 일어난 후 꼭 열흘 후였다.

민심이 흉흉한 난리 통에 어머니는 산후조리는커녕 한 달 후에는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당시 우리 집은 나름 먹고살 만했고 일제강점기에 의성군청 공무원, 일본회사인 동양면화 필리핀 주재원, 그리고 해방 후 중앙청 외자 구매처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할아버지는 그들이 말하는 소위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일가식솔을 이끌고 피난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식구들이 포격과 총탄을 피해 청도 근처까지 떠밀려 오던 1950년 9월 1일, 낙동강 전선에서 마지막 교두보를 형성하던 국군은 부족한 병력 수급을 위해 피란민들 사이에서 젊은이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하였다.

즉석에서 강제징발 당한 23세의 아버지는 피붙이 아들을 업은 21세의 어머니를 두고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청도 게지동 고갯길을 그렇게 넘어가셨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짧은 훈련 후 1사단 15연대에서 군번 2706029를 받고 바로 최전선 전투 요원으로 전쟁에 참여하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편지는 10월 중순 평양에 입성하였다는 소식이었다.

편지 속에는 1사단이 가장 먼저 평양 입성하였다는 자부심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였고 후퇴를 거듭하던 중, 이듬해 4월, 중공군의 2차 대공세로 중부 전선에서 밀고 밀리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1951년 4월 27일 아버지는 그 전투에서 실종되셨다. 전쟁 한가운데에서 실종이란 통보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다.

전사하였는데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는 뜻과 살아있지만, 포로가 되어 북한에 잡혀 있다는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는 단어다. 당연히 우리 집은 후자에다 방점을 찍었다.

할아버지는 휴전 후, 남북 포로 교환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셨고, 그분들 중, 포로수용소에서 아버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이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아버지는 살아있다고 그렇게 믿으며 살았다.

남북 고위급이 손을 맞잡고 7.4 공동성명을 발표할 때는 금방이라도 아버지가 대문 열고 집으로 오실 것만 같았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때는 눈물 바람으로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했다.

아버지의 실종 통보는 우리 모자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하늘의 명령 같았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신청 가능 여부를 저울질하다가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10여 년 전, 6.25전사자 유해발굴감식단에 나의 DNA를 제공하였다.

 

할머니의 애절한 기다림

아버지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우리 가족이 어렵고 힘들 때는 위로이자 희망이고 버팀목이지만, 마무리가 안 된 미련을 달고 살아야 하는 고문이기도 하였다. 가능성이 희박한 희망에 매달린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 소식 없는 아버지의 회갑이 되는 날, 82세의 할머니는 달력 뒷장을 뜯어 ‘수연이라!’라는 제목의 장문 편지를 쓰셨다.

수연이라!

정권아, 우리가 경인년 육이오 피난길로 온 가족이 남부여대 업고지고 초행상숙, 험한 길을 촌촌이 걸어가노니 연연약질 너의 아내 열 발가락 다 깨어지고 너의 할아버님 행년 칠십 근력조차 쇠진한데, 식사옳게 못받들어 죄스럽고 가엽고, 한 달을 너와 같이 다니다가 추 칠월 십구일, 무겁고 중한 짐을 벗어놓고 굶주려 고픈 배를 충복 한번 못해보고 끌려가던 그 고개가 게지동이 아니더냐? 한 많은 어미 정은 한숨이 바람 되고 마디마디 맺힌 시름, 비 오듯이 흐른 눈물 치마폭을 다 적시고……. 슬픈 마음 진정하여 삼년만 지나면 대공을 세워놓고 집으로 돌아오면 충신열사 아니냐? 그런 생각을 가슴에 담뿍 안고 청도까지 밀려가서 한 달을 지체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허물어진 빈집에 잡초만 우거져서…….

정권아! 너 없이 어이 살꼬? 답답하고 애달프다. 너 잡혀갈 때 너의 아내 이십일세 꽃다운 청춘 홍안 기막히고 불쌍하여 어미 간장 다 녹았다. 강보유아 우리 형진 잘 길러 국민학교 마치고 지어미 대구 가서 침모하고 온 가족이 무진 고생 다 해가며 근근이 대학을 마치고 어느 명문 대가의 요조숙녀를 맞이할꼬 마음조이다가 무오년 원 월 이십일 물실로 취행시켜 만금손부보니 이 좋은 만복대례석을 너를 어이 못보이노? 원통하고 극분하다. 증손이 이녀일남 주옥같이 잘 크는 걸 너를 어이 못보이노?

정권아!

군신이 무엇이며 나라가 무엇이냐? 국법으로 네가 가서 무슨 공을 세우려고 처자 부모 다 버리고 삭풍 서리 찬바람에 삼십구 년 고생하노.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하는구나. 염량이 때를 알아 가는 듯 다시오니 무진년 돌아와서 네 환갑 되었구나! 영광으로 못 지내니 슬프고 애절하다. 형진어미는 형진이 대학교수 되어 충무에 살림 차려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많은 고생 다 해가며 알뜰살뜰 봉양하고 너의 부자 생각하여 우리 집 조상되고 제 일신 희생하니 효부 열녀 아니더냐? 나의 현부 착하구나! 행년 팔십 넘은 어미 네가 없는 신세로서 초목에다 비유하면 상순 꺾인 모양이다. 북선이 어디메뇨? 철조망이 원수로다. 김일성의 원수를 어찌하여 다 갚을꼬?

이마 위에 손을 얹고 사시장철 기다려도 소식조차 적조하니 보고지고 보고지고 너의 얼굴 보고지고, 듣고지고 듣고지고 너의음성 듣고지고, 못봐서 병이되고 못잊어서 광심이다. 귀천부귀 다했거든 어서 빨리 돌아오라. 을축년 동 시월에 너의 부친 별세했다. 일구월심 너 보고자 하던 심정, 한을 맺고 가시더라. 내 마음은 방랑하여 무진년 동지 월을 또다시 만났으니 내 가슴의 깊은 상처 일백 창이 찌르는지 일백 칼이 쑤셨는지 아프고 쓰라려서 마음 실로 부서진다. 저 내년 경오년이 우리 현부 수연이다. 어서 빨리 돌아와서 다시 한번 만나보자.

 

나의 어머니

나는 아마도 초등학교 때 싹이 조금 보였나 보다. 졸업 시 전교 일등을 했으니, 용기를 얻은 우리 엄마, 집안 어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를 데리고 대구로 나오셨다. 집안 어른들의 의견에 저항하여 집을 나올 수 있던 힘은 나의 성적이었다. 그러나 괘씸죄에 걸린 우리 엄마, 나올 때 무슨 큰 도움을 받았으랴…….

어머니는 중고 6년, 부산에서 대학 4년 등 10년 이상 삯바느질로 공부를 시키고 생활비를 충당하였다. 단칸방에서 자다가 잠을 깨면 늘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돌돌……

1968년 여름쯤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이 가까워도 나는 대학을 가려는 계획도 없었고 갈 형편도 아니었다. 그때 마침 구세주처럼 박정희 대통령이 군경유자녀에게 공기업에 특별 채용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즉, 우체국, 철도청, 전매청 등등……. 시험도 필요 없고 원서만 내면 바로 합격하는 초 특혜였다.

나와 같이 늘 붙어 다니며 말썽을 부리던 같은 동네 친구 녀석은 상고 졸업도 하기 전에 철도청 정복을 맞춰 입고 월급쟁이를 시작하였다. 나는 기쁜 소식에 용기백배하여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는데, 이제는 바느질 그만두세요. 제가 취직해서 돈을 벌겠습니다.’

‘대학은 안 가고?’

‘어머니 고생하시는 것 더는 볼 수 없습니다.’

슬픈 눈물을 머금은 체 한참 나를 쳐다보시던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네가 공부하기 싫어서 대학을 안 가겠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마는 엄마를 위해서 대학을 안 가겠다는 말은 다시는 하지 마라. 나는 네가 대학을 갔으면 한다. 그렇게 나를 내세워 네가 희생하는 체하는 것 나는 반갑지 않다.’

나는 어머니의 반응에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나의 눈물겨운 효성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엄마가 그렇게 원하면 대학을 가지요.’

‘알았다.’

어머니는 덤덤하게 그렇게 말을 끊었다. 나는 그날 저녁 처음으로 인근에 있는 독서실을 찾았고 밤을 새워가면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집에는 밥 먹는 것 외에는 독서실에서 거의 살았다. 벼락공부도 어려운데 갑자기 예비고사가 발표되었다. 나는 예비고사 공부를 하랴, 본시험 준비를 하랴, 거의 날밤을 새우면서 몇 달을 보냈다. 예비고사를 겨우 통과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등록금이 싸고 가장 빨리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대학을 선택하였다. 그 대학이 나를 취업시켜 주었고, 그 대학이 나를 교수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어머니와 담판이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어머니가 아들의 조그마한 효도에 기뻐하며 만족하였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어머니는 적어도 나에게는 큰 산 같으신 분이다.

1978년 나는 통영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러자 우리 엄마, 갑자기 역할이 없어졌다. 어머니는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라는 듯이 시골로 다시 돌아갔다. 늙으신 시부모를 모시고 살기로 한 것이다. 사람들은 환호하였고, 여기저기서 보기 드문 효성이라고 칭송하였다. 옛날 사람들이 원하던 유교 사상의 완성을 보여주셨다.

자식을 위해 객지에서 삯바느질로 학비를 마련하여 대학까지 보냈고, 아들을 대학교수로 만들었으며 결혼시켜 살림을 차려주고는 시골로 돌아와 시부모를 공양하는 사임당 같은 분이라면서 인근의 비안향교에서 ‘효부열녀상’을 수여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시골 군 단위까지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이러한 결정을 하도록 방임하였던 것을 후회한다.

아니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내가 편해지고자 우리 엄마를 또다시 힘든 곳으로 보냈던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 늘 가슴 한쪽을 시리게 하였다. 그러나 울 엄마 한 번도 내색하지 않고 85세까지 오토바이 타고 다니시면서 시골동내 할머니들 대장 역할을 하면서 씩씩하게 잘 지내셨다.

나는 늘 어머니를 위한 방 한 칸을 남겨두고 언제 모셔올까 궁리하며 살다가, 결국은 집 대신 요양병원으로 모시고 말았다. 부모는 자식의 밥이라더니 지금 애들이 성장하고 결혼을 시켜보니 울 엄마의 큰 사랑과 은혜가 새삼 더 크게 다가온다. 우리 어머니는 태산 같으신 분이다.

아버지의 귀환

1951년 4월 27일 임진강 유역 중부전선 전투에서 실종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지, 만 67년, 피란 중 우리 가족과 헤어진 지 68년이 지난 오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반에서 전화를 받았다. 99.999% 일치하는 유골을 찾았단다.

우리 아버지였다.

우리 가족들이 “숙명처럼 그리워하였던 분”,

“살아있다.”라는 강한 믿음을 주셨던 그분,

아! 나의 아버지.

세상은 신앙의 눈으로 보면 기적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꼭 신앙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의 현상들이 신기하게 합쳐지면 그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세상에는 수많은 기적이 보인다.

13만 3192명의 실종자 중에서 유골을 수습한 분이 1만 1372명, 그중에서 유전자 검사가 일치하여 가족 품으로 돌아온 분이 단 128명뿐이었는데, 129번째로 나의 아버지가 우리 품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확률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귀환이다. 아버지가 돌아오신 날은 2018년 7월 5일이었는데, 이날은 나의 생일이자 아들의 생일이었다. 아버지는 신기하게도 아들과 손자의 생일날에 돌아오셨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긴 사진은 단 한 장뿐이었는데, 그것마저 수십 년 전에 잃어버려서 집에는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그런데 유전자가 일치되었다는 통보를 받기 며칠 전, 서울 고모님이 자기의 옛 앨범 속에서 잃어버렸던 그 사진을 거짓말처럼 발견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비슷한 시기에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이 서너 가지 현상들이 교집합을 이루자 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하고, 이것을 기적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68년간이나 파주 광탄면 박달산 기슭에 외롭게 묻혀있었던 아버지가 부활하셨다.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신 애국자요, 호국의 영웅이셨음에도 그동안 자식에게 제사상도 못 받으셨던 아버지가 당당하게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가족으로부터 존경심을 얻고 앞으로 대전현충원에 모셔져 자손들의 영광스러운 조상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하다.

기적을 만들어 주신 나의 하느님, 어머니 살아생전에 아버지를 찾아주신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2018. 8. 15 김형진

김형진 기계시스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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