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전화가 옵니다. 저녁 어스름한 시각에 술을 한잔 하지 아니하고서는 낮에 전화를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전화가 온 이유는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가 나왔으니, 주문해 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가까운 곳에 '이문당서점'이 있을 때에는 직접 가셔서 책을 사다 보곤 하셨지만, 얼마전부터 인터넷으로 책을 몇 번 주문해 드린 후로 가끔 전화로 신간을 주문해달라곤 하십니다. 매달 이문당서점에 가셔서 '월간조선'을 구입해서 읽으셨고, 매일 아침마다 오는 동아일보를 거실 바닥에 넓게 펼쳐두고 반쯤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줄을 그으시며 정독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오전 일과입니다.

어렸을적 아버지는 항남동에서 식당을 하셨습니다. 삼계탕을 전문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를 하셨는데, 꽤 잘되는 식당이었지요. 아침 일찍 주문한 생닭이 오면 커다란 솥에 초벌로 삶아서 건지셨습니다. 육수를 빼서 준비하셨고, 삼계탕에 들어가는 마늘, 대파 등 야채를 손질하셨습니다. 방학때 나는 아침 일찍 가게로 배달되는 동아일보와 스포츠신문의 연재면의 만화와 소설을 얻어(?) 읽기 위해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마늘 꼭지를 따고, 마늘을 썰었습니다. 장사 준비가 어느정도 마무리 되면 아버지가 첫 번째로 신문을 읽으셨고 그 다음이 내 차례였습니다. 나는 연재 만화와 연재 소설을 읽기 위함이었지요. 내가 신문의 만화와 연재 소설을 읽고나면 내 동생이 그 신문을 읽는 순서였습니다. 바쁘고 정신없이 식당을 하셨지만,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신문을 읽던 기억이 나에게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연세가 많으셔서 식당은 접으셨지만 오전 시간 신문을 정독하시는 습관은 여전하십니다.

아버지는 여느 경상도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무뚝뚝하시고 다정다감한 면은 없으십니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으시고 약주를 한잔 하시면 그나마 하시고싶은 이야기를 하곤 하시지요. 어렸을 적 갖고싶던 것이 있어서 엄마를 조르다조르다 못해 슬쩍 아버지께 한마디 하면 엄마 몰래 사주시기도 했고, 김홍신 '인간시장' 조정래 '태백산맥' '아리랑'같은 책도 아버지가 사서 읽으시고 그 책을 받아서 읽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된 환경은 나의 아버지에게 얻은 습관이었습니다. 이제는 눈이 어두워지셔서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으십니다. 읽는 속도도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어떨땐 아버지 새 책 주문해드릴까요? 라고 물으면 "귀찮다"라고 말씀 하실 때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세월 앞에 아버지도 어쩔수 없음이 느껴집니다. 항상 TV조선이나 채널A를 틀어 놓고 보셔서 같은 채널만 보지마시라고 잔소리하는 저와 실갱이를 벌이기도 합니다. 건강 생각하셔서 약주를 조금만 줄이시라고 잔소리하는 저에게 니 걱정이나 하라고 농담을 하는 나의 아버지.

얼마전 아버지의 칠순 생신이었습니다. 가까운 친척들과 가족들만 초대하여 조촐하게 고희연을 열어드렸습니다. 동생네와 우리 식구들 엄마 아버지 모여서 가족사진도 찍었습니다. 아들없이 딸만 둘이라 못내 섭섭해 하셨던 옛날 사람이지만 금딸 은딸이라고 부르며 나와 동생을 정성으로 키워주셨지요. ‘효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고 싶습니다. 억지로 착한 딸인척 하며 효녀코스프레는 하지 않으렵니다. 그냥 지금처럼 아버지께 싫은 소리도 하며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곁에 계셔주시기를 못난 딸이 바라는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이 나의 가장 큰 바탕이 되어주셨습니다. 보고 배운 것이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곁에 계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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