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학생들 떠난 폐교,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다”
<2>폐교에서 전시·체험시설로 변신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기획취재 “학생들 떠난 폐교,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다”

<1>산촌폐교를 재생한 소규모 복합문화공간 ‘감자꽃 스튜디오’

<2>폐교에서 전시·체험시설로 변신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3>지역의 폐교를 개조한 캠핑장, ‘제천 하늘뜨레’와 ‘함평 나비마을’
<4>폐교는 옛말, 아이들의 안전을 책임진다, ‘통영 해양안전체험센터’
<5>폐교위기 직면, 통영의 소규모학교의 미래는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437-5번지
폐교된 분교장 사진갤러리로 재탄생

학구민의 정성으로 마련된 부지에 1964년 8월 20일 신산초등학교 삼달분교장으로 학교인가를 얻었다.

한때는 탁구로 제주도 및 전국에 이름을 날리기도 했고, 당시 삼달분교장은 삼달지역 1~4학년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 5~6학년 학생들은 하루 10km를 오가며 신산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러는 와중, 취학아동이 자연스럽게 증가, 삼달분교장이 본교로 승격될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학부모와 지역주민들은 학교설립위원회를 조직, 교육청에 건의한 결과 1967년 3월 1일 삼달국민학교가 인가되고 4월 7일 학교 문을 열었다. 1970년 2월 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하지만 1990년 들어서 학생 수가 급격히 감소, 1996년 다시 삼달분교장으로 격하, 1998년 2월 28일 신산초등학교로 통합되며 결국 문을 닫았다.

신산초등학교 삼달분교장으로 격하되는 34년의 역사 동안 29회의 졸업을 마지막으로 총 70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 갤러리 건물 인근에 학교 설립 당시 학교터 및 학교에 필요한 각종 물품들을 기부한 기부자 기념비에서 이 마을 주민들이 학교 설립을 얼마나 열망했는지 느낄 수 있다.

 

제주의 자연, 사진예술로 승화
제주인들에게 정체성 일깨우다

현재의 이곳은 아이들의 배움터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하루 300여 명의 방문객이 찾는 사진갤러리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이 대신 자리하고 있다.

2001년 폐교 임대 후 공사 시작, 2002년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이 개관했다.

특히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은 김영갑의 뜻을 이어 제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작품을 잘 보존, 어려운 여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와 투병 중인 난치병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설립됐다.

2001년 11월 폐교된 삼달초등학교를 임대해 2002년 8월 한라산의 옛 이름인 ‘두모악’으로 개관했다. 그 후 시설을 재정비해 2006년 2월 24일 1종 미술관으로 등록했다.

제주를 찾은 관광객 만족도 조사 1위, ‘잘 가꾼 문화유산’ 선정, 2015년 한국관광 100선 선정, 제주관광대상 관광지업 부문 대상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사진 갤러리로 재탄생 한 삼달분교장,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이다.

두모악은 충청남도 부여 출신으로 제주에 정착해 살면서 제주의 자연을 품격 높은 사진예술로 승화시키고, 제주인들에게 정체성을 일깨운 김영갑의 탁월한 업적을 기리고, 그의 작품과 유품을 살필 수 있다.

또한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은 제주와 서울에서 김영갑 특별전을 꾸준히 열고 있으며, 김영갑이 작업했던 장소를 찾아가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직접 사진을 찍어보는 ‘내가 본 이어도’ 답사 활동을 주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더불어 갤러리 홍보와 지역민들에게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야외 공연장에서 음악회를 열고 있다.

 

폐교의 8개 교실을 이어 갤러리로 탄생
김영갑이 사랑한 제주의 바람, 돌, 자연

2011년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은 단층짜리 폐교를 개조해서 만든 아담한 갤러리다.

두모악은 폐교의 8개 교실을 이어 제주의 바람과 돌, 자연을 자신의 몸보다 사랑했던 김영갑이 20여 년간 활동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두모악관’, ‘하날오름관’에서는 오름·중산간·마라도·해녀 등 제주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고, ‘유품전시실’에는 고인이 평소에 보던 책과 카메라가 전시돼 있지만 잠긴 문의 유리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루게릭병으로 투병하던 모습과 2005년 5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던 모습이 전시돼 있다.

김영갑 작가가 손수 실어 나른 돌과 나무들로 꾸며진 야외 정원과 무인 찻집은 갤러리를 찾는 방문객을 위한 휴식과 명상의 공간이며, 야외 공연장은 지역민들을 위한 문화 공연장이 되고 있다. 더욱이 불치병으로 더 이상 사진작업을 할 수 없었던 김영갑 작가가 생명과 맞바꾸며 일군 두모악에는 평생 사진만을 생각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한 예술가의 애절함이 곳곳에 배어 있다.

루게릭병으로 인해 거동조차 불편했던 몸으로 옛 삼달초등학교를 직접 다듬고 손질해서 멋진 갤러리로 탈바꿈시킨 사진작가 고 김영갑 그는 “삶에 지치고 여유 없는 일상에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서 와서 느끼라고, 이제까지의 모든 삿된 욕망과 껍데기뿐인 허울은 벗어던지라고, 두 눈 크게 뜨지 않으면 놓쳐버릴 삽시간의 환상에 빠져보라고 손짓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주의 진정성을, 제주의 진짜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넉넉한 마음입니다. 그것이면 족합니다”라는 생전 메시지를 통해 그가 얼마나 제주를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다.

 

투병생활 6년, 2005년 5월 29일 별이 된 김영갑
2007년 9월, 김영갑갤러리두모악 운영위원회 발족

투병 생활을 한 지 6년 만인 2005년 5월 29일, 김영갑은 그가 손수 만든 두모악에서 고이 잠들었고, 그의 뼈는 두모악 마당에 뿌렸다.

별세 후 두 달 뒤 2005년 7월 후원회 결성 및 임원을 선출, 2006년 달력, 액자형 사진집(용눈이오름), 인쇄물 제작 지원, 2006년 전시실 내 냉난방 시설 일부지원, 김영갑 작가 1주기 추모행사 지원 활동을 이어나갔다.

특히 2006년 11월 작품수장고 공사와 12월 후원회 임시총회를 개최, 이듬해 5월에는 후원회 소식지 발간에 이른다.

2007년 9월에는 김영갑갤러리두모악 운영위원회를 발족, 현재 이유근 회장을 필두로 위원회를 이끌고 있다.

김영갑갤러리두모악 지기 박훈일씨는 “김영갑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도 많은 분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으로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을 지켜낼 수 있었다.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은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고, 잘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귀중한 문화자산이다. 선생님이 지키고자 했던, 하고자 했던 많은 일들이 이제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 됐다”고 말했다.

또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 후손들을 위해,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어려운 예술가들을 위해, 난치병과 싸우고 있는 많은 분들을 위해, 이것이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이 영원히 남아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이 영원히 이곳에 보존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제주 지역 폐교, 창작공간 변신
주민밀착형 문화프로그램 활성화

제주 농어촌 지역의 폐교가 예술인들의 창작공간 및 주민들의 문화향유 공간으로 변신하는 문화거점 조성 사업이 활발히 추진 중이다.

제주도는 올해 38억원을 투입, 폐교 등을 활용한 ‘농어촌지역 문화예술 거점시설’을 조성 중이다.

특히 1995년 폐교된 제주시 한경면 소재 산양초등학교에 18억원을 투입해 예술인 창작공간·전시실, 주민 이용시설인 커뮤니티룸, 입주작가 숙소 등을 갖춰 나간다는 계획이다.

도 관계자는 “문화예술 거점시설이 완공되면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활동공간이 확대되는 것은 물론 접근성이 취약했던 주민들의 문화향유 기회도 넓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역 문화예술계 관계자는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관 주도의 문제 해결 방식에서 벗어나 전문 역량을 가진 지역 리더와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장애인, 여성, 아동, 청년, 노인 등 다양한 계층이 누릴 수 있는 주민밀착형 문화프로그램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남자가 목숨 바쳐 사랑한 제주의 참모습“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을 일군 사진작가 김영갑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이래 20여 년 동안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서울에 주소지를 두고 19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던 중 그곳에 매혹, 1985년 그의 나이 스물여덟, 아예 섬에 정착했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섬의 ‘외로움과 평화’를 찍는 사진 작업은 수행이라 할 만큼 영혼과 열정을 모두 바쳤다.

창고에 쌓여 곰팡이 꽃을 피우는 사진을 위한 전시관을 마련하기 위해 버려진 초등학교를 구해 초석을 다질 무렵, 언제부턴가 사진을 찍을 때면 셔터를 눌러야 할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이유 없이 허리에 통증이 왔다.

나중에는 카메라를 들지도, 제대로 걷지도 먹지도 못할 지경이 됐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3년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다.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점점 퇴화하는 근육을 놀리지 않으려고 손수 몸을 움직여 사진 전시관 만들기에 열중했다.

그렇게 ‘김영갑갤러리두모악’ 미술관이 2002년 여름 문을 열었다.

하지만 투병 생활을 한 지 6년 만인 2005년 5월 29일, 김영갑은 그가 손수 만든 두모악에서 고이 잠들었고, 그의 뼈는 두모악 마당에 뿌려졌다.

이제 김영갑은 그가 사랑했던 섬 제주, 그 섬에 영원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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