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익어가는 단풍 구경도 좋고, 밤낮으로 바뀌는 바람 온도를 느끼기도 좋다. 가을은, 변화하는 모습에서 세상의 이치를 궁리하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출근길이 산책길인 통영. 걸어서 출근하기에 딱 좋은 길, 서호시장에서 운하교와 통영대교를 지나 인평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내게 너무도 익숙한 길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새롭다. 어제의 만남과 오늘의 만남은 다르다.

오감으로 달려드는 계절의 변화와 하늘과 바다의 변신이 주로 생각에 불꽃을 튀긴다.

가끔은 스치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한다. 특히 마음을 흔들어대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은 아주 특별하고, 그만큼 늘 기다려진다.

인평동 바닷길에서 만난 J 옹이 그러했다. 길거리를 단장하는 공공근로 할아버지. 어찌나 일을 꼼꼼하게 하시는지 손대어 지나간 곳은 상전벽해가 된다.

뵐 때마다 수고하신다고 인사만 드리다가, 쪼그려 앉아 일하시는 할아버지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았다. 궁금함이 폭발했다.

왜 이리 꼼꼼하게 풀을 뽑으시냐 여쭈었더니, 원래 성질이 그래서 그렇단다. 일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하시는 편이라고. 그리고 덧붙이는 말씀, "해놓고 돌아보면 기분이 좋다. 이 기분으로 일한다" 작업해 온 뒤쪽을 바라보는 표정에 흐뭇함과 자부심이 묻어난다.

손에 쥔 낫이 반짝인다.

구석진 곳을 긁어내기 쉽도록 끝이 뭉툭하다.

풀 한 포기 없이 말간 표정으로 줄지어 앉은 보도블록들이 웃으며 화답한다. 쏟아지는 웃음 속에 나도 덩달아 빙그레 웃는다.

땀도 식히실 겸 살아오신 얘기를 두런두런 들려주신다.

뇌출혈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두 번의 수술을 거쳐 거뜬히 일어나게 된 사연이며, 저승에서 목격한 재판 광경 얘기며, 다시 가서 더 살다 오라고 해서 가마 타고 돌아온 얘기며, 몸은 건강해져 불편함 없이 일할 수 있어 좋은데, 기억력이 형편없다는 얘기며.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일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고 하신다. 돈을 위해서만 일하시는 건 아니구나 싶었다.

일할 수 있어 좋고, 스스로 한 일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며 즐겁게 일하시는 할아버지.

화장실이 급하다며 허리춤을 움켜잡고 공중화장실로 뛰어가신다. 뛰어가는 발밑이 깔끔하다.

이 길이 꽃길이다. 일하지 않고 '폼생폼사' 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 일이 좋아서 즐겁게 일하며 사는 게 꽃길이다. 꽃을 꺾어다 뿌려둔 길이 꽃길이 아니다. 꽃을 심고 가꾼 길보다, 누군가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닦아가는 길이 진짜 꽃길이다.

J 옹이 뛰어간 길을, 깔끔하게 정돈된 길을 천천히 걷는다. 발걸음이 가볍다.

우리 모두 꽃길만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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