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에게 카톡이 와있어서 보니 조카의 생일이니 생일선물로 줄 책을 권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조카는 초등학교 6학년이다. 동생은 초등버전 데미안을 선물로 주고 싶으니 출판사를 골라달라고 했다.

아이들을 만나고 방문수업을 하는 직업을 가진 나는 책을 추천해달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원래 해야하는 말(–초등 저학년 때에는 전래동화, 세계 명작동화 고학년 땐 고전읽기를 시작하는 단계라는)을 나의 조카에게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책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오랜 신념(!)이다. 책이 유희의 역할을 잃게 된다면 머지않아 책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재미있고 흥미로운 영상물은 얼마나 넘쳐나는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해서 읽을 리가 없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 책을 읽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말 따위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책이 재미가 없다면 아이들은 유튜브나 게임이나 스마트폰에 눈을 돌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다. 어렸을 때 처음으로 나의 영혼을 훔쳐간 책은 셜록홈즈, 뤼팡이 나오는 돌핀문고의 추리소설들이었다. 영혼을 훔쳐갔다고 할 만큼 초등학교 3-4학년때의 나는 열심히 그 책들을 읽었다. 왜냐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이들이 읽는 소년탐정 김전일, 명탐정 코난을 보는 아이들을 보면 어렸을 적 나를 보는 듯하다.

조카에게 택배로 책 4권을 선물로 보냈다. -김동식 '회색인간' '13일의 김남우' 만화'미실' 그리고 '리어왕,오셀로'였다.

택배가 도착한 다음날 조카에게 전화가 왔다. 6학년인 조카는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이모, 고맙습니다. 책 너무 좋아요!’라고 했다. 어떤 책이 재미있었냐는 말에 '회색인간'이라고 대답했다. 곧이어 동생이 전화를 바꿔받아 말했다.

“언니야, **이가 그 책을 쭈욱 훑어보더니 대사에 욕 나오는 부분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그 책 먼저 보더라”라고.

6학년 남자아이에게 욕섞인 대사가 흥미로운 것은 당연하다. 인터넷에서 연재되어 히트한 웹소설을 책으로 엮은 '회색인간'이나 '13일의 김남우'는 짧은 이야기 여러 편이 묶인 책이므로 읽기에 부담이 없다.

김동식 작가는 최근 꽤 핫한 인물이다. 글쓰기를 배운적 없는 주물공장 직원이었던 그는 인터넷 ‘오늘의 유머’에 글을 연재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댓글의 피드백이 글 쓰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그의 이야기들은 하나하나 기발하고 재미있다. 6학년 아이에게 욕을 하지 말아라고는 할 수 있지만 듣지도 말라고 귀를 막을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 3자가 제 4자에게 하는 욕을 지나가다가 들을수도 있고 어쩌다가 직접 듣게 되는 운 나쁜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책에서 활자로 읽는 욕이 나쁘다고 볼수 없다. 앞뒤 맥락에 어울린다면 욕이 들어가야 하는 순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책을 통해 배울수 있는 교훈이 될 것이다.

책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하며 책에 있는 지식을 내용을 머릿속에 넣어야하는 목적으로 책을 가까이하라고 한다면 교훈을 얻는 방법, 지식을 얻는 방법은 책보다 더 좋은 방법이 많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영상물로서 고전을 접하는 것이 더 쉽다. 책으로 '로미오&줄리엣'을 읽는 것보다 영화 '로미오&줄리엣'을 보는 것이 더 쉽다.

권선징악이라는 교훈을 주기위해 책을 읽게 한다 해도 영상물로 만들어진 유튜브에 떠있는 영상으로 된 동화가 더 쉽다. 활자로 된 동화를 읽어주는 것보다 EBS에서 만든 '아이쿠'영상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엄마에게도 더 쉬운 방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이에게 책을 읽게 할 것인가?

책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방법밖에는 없다. '재미'라는 것은 참으로 개인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누구에겐 재미있는 것이 또 다른 누구에겐 재미가 없을 수 도 있다는 것이 문제이므로

내 아이의 흥미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주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아이의 흥미를 끌만한 꺼리를 찾아내지 못하면 실패다.

보통은 내가 만난 6-7세의 아이들은 공룡, 곤충, 괴신이야기를 좋아했다.

4-5세의 아이들은 똥, 동물 이야기를 좋아한다.

전래동화 중에는 '귀신'이나 '똥'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인기가 있다.

저학년 아이들에게는 WHY책 시리즈가 인기가 있다. 궁금하거나 관심 있는 키워드의 WHY책을 찾아서 읽게 하는 것이 좋다. 고학년이 되면 아이들의 관심사는 아이에 따라 천차만별이므로 엄마나 아빠가 대화를 통해 유추해낼 필요가 있다.

초등고학년이 되면 관심사가 다양해지고 사춘기가 찾아오기 때문에 섣불리 책을 권하면 '꼰대'부모 소리 듣기 딱 좋은 모양새가 된다. 또 책 읽으래? 엄마는 읽나? 아빠도 안 읽으면서? 라는 말을 아이의 표정을 통해 읽을 수 있게될 것이다. 가을? 독서의 계절 이라구요? 엄마, 아빠도 안 읽으면서?

소위 교육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이 권하는 초등고학년 필독서라고 나오는 책의 목록을 보면 기가 막히다. '논어' '맹자' '도덕경' '삼국유사' '백범일지' '삼국지' '손자병법' '목민심서' '명심보감' '금오신화' '사씨남정기'...

초등학교 때 이미 책읽기에 질려버리라고 이런 권장도서를 필독서 목록에 넣어 놓는단 말인가?

삼국지, 손자병법은 영화나 무협지로 보는 것이 더 재미있다. 영화 '적벽대전'을 먼저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사전 지식 없이 무자비하게 던져주거나 강요하는 독서는 그야말로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고문이 아닐까? 그런 고문에 다름없는 독서를 강요한다고 하여 아이들이 그 책을 읽을 리 없다.

정말로 그런 책들을 읽히고 싶다면 그 책의 배경지식이나 사전 정보를 먼저 맛보여주는 것이 우선이다. 영화나 영상, 무협지를 권하고 싶지만 더 좋은 것은 부모가 먼저 읽고 아이의 관점으로 이야기 해주는 것이 가장 좋다.

'엄마, 아빠는 너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으니까 너희들은 열심히 책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는 옛날 부모버전이다.

부모가 책 읽을 시간이 없는데 아이라고 책 읽을 시간이 있을까? 요즘 아이들은 부모보다 더 바쁘다. 일단, 부모님이 먼저 읽고 권하자.

나의 조카가 읽고 재미있었다고 느낌표를 몇 개씩 찍어 보낸 그 카카오톡 메시지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모, 재미있는 책!!! 보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가을, 독서의 계절 아이들에게 책의 재미를 먼저 느끼게 하는 가을이 됐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