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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가슴시린 비극으로 끝난 마흔의 천재예술가
그림 속 따뜻한 풍경의 예술혼, 통영르네상스의 한 페이지
  • 김영화·박초여름 기자
  • 승인 2018.11.0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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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이중섭과 창작의 활화산 통영

②예술가들이 본 통영의 이중섭

③제주도에 살아 숨 쉬는 이중섭

④부산 범일동의 이중섭 풍경

⑤위대한 유산 이중섭, 통영은 어떻게 화답할까

 

녹음다방 4인전 중의 이중섭, 뒷편에 통영에서 작업한 '소' 작품들이 보인다.

한국의 고흐라 불리는 비운의 천재 화가 이중섭(1916-1956).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미술가이지만 그의 생애는 고흐만큼이나 슬프기만 하다.

가난과 배고픔으로 얼룩진 41년의 생애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이중섭은 대한민국 문화계 ‘살아있는 신화’가 된 지 오래다.

천재 화가의 짧은 삶 속에서도 이중섭의 예술세계에 있어 통영은 엄청난 안식처이자 창작의 활화산이 됐다. 이중섭이 1950년 12월 국군 철수를 따라 가족들을 거느리고 원산항을 떠나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 생활에 이은 제주도 서귀포 생활(봄에서 12월까지)을 거쳐 통영에서 한 겨울을 지냈던 것은 1952-1953년의 일이다.

통영은 유강렬의 권유로 1952년부터 약 2년간 머물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4인전, 개인전 등 그의 예술의 혼을 펼쳤던 곳이다.

1954년 봄에 끝나는 이 길지 않는 통영 시절이 이중섭의 예술을 위해서 귀한 시절로 남았다.

그가 남긴 걸작의 상당한 부분은 잔잔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름나 있는 통영에서 제작됐다.

통영은 이중섭이 아주 짧은 기간 거주했지만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흰소, 황소, 달과 까마귀, 부부, 가족 등 그의 대표작들을 창조해낸 곳이다.

한때 통영시가 미술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통영풍경 등 이중섭 그림 속 통영풍경을 찾아 관광명소화 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 이중섭 거주지와 작품 활동지 등에 미술관 또는 기념관 등을 추진, 테마 관광지로 발전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탄생 100년 하고도 2년이 더 지난 지금, 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지난 4월에는 창작의 활화산 통영을 비롯 이중섭이 영원히 잠든 서울 중랑구, 말년을 보낸 서울 성북구, 이중섭의 범일동의 풍경을 선사한 부산 동구, 친구 구상의 도움으로 마지막 전시회를 연 대구 중구 등 이중섭과 인연 있는 5개 지자체가 인프라를 함께 구축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이중섭 발자취 프로그램 공동 운영 실무협약(MOU)’을 통해 5개 지역은 △이중섭의 발자취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인프라 구축 및 홍보 △문화체육관광부 사업 선정을 위한 업무 공동 수행 △이중섭과 관련한 프로그램 개발, 학술 연구, 전시회 개최, 공동 프로그램 운영의 상호 협력 △기타 각 기관의 상호 발전을 위한 협력사항 등을 도모하고 협력키로 합의했다.

과연 통영에서의 이중섭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그 한국근대미술사의 한 위대한 유산을 찾아가보자.

1950년대 남망산에서 본 통영항 전경 (류완영 作).

 이중섭이 1950년 12월 국군 철수를 따라 가족들을 거느리고 원산항을 떠나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 생활에 이은 제주도 서귀포 생활(봄에서 12월까지)을 거쳐 통영에서 한 겨울을 지냈던 것은 1952년쯤의 일이다.

공식 연보에는 1953년이라 기록돼 있지만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장 등 당대 여러 증언과 남겨진 그림을 볼 때 52년이 더 타당한 것 같다.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장은 “1951년 7월쯤 유강렬 선생이 통새미 주변 적산가옥 2층에 하숙하고 있었다. 그 이듬해 유 선생이 부산에서 이중섭을 만나 통영으로 올 것을 권유했다. 이중섭이 통영에 온 것은 1952년 봄이다. 1953년 12월 40여 점의 작품으로 성림다방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남겨진 작품을 보더라도 통영에서 봄과 겨울을 지내야만 연초록 풍경화와 벌거벗은 나무와 들판을 그릴 수가 있다”고 증언했다.

1954년 봄에 끝나는 길어야 2년인 통영 시절이 이중섭의 예술을 위해서 귀한 시절로 남았다.

그가 남긴 걸작의 상당한 부분은 잔잔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름나 있는 통영에서 제작됐다.

이중섭거주지 및 나전칠기강습소.

 통영의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교육 책임자로 있던 공예 미술가 유강렬의 권유가 이중섭에게 모처럼의 생산적인 한 계절의 시간을 선사했던 것이다.

한 해 전 그리움이 사무쳐 선원증으로 건너간 일본에서의 일주일이 아내와 아이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돌아온 이중섭은 가족이 있는 일본과 가까운 통영으로 이사해 왔다.

그는 유강렬이 제공하는 침식(항남동 구보건소 옆 일명 빕스 건물)에 기대어 오랜 만에 그림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옛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은 현재 경남 통영시 항남동에 있으며, 개인이 소유하면서 식당과 주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초 신축 시기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이며, 부지 258㎡에 지상 2층 규모로, 나무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놓아 기와로 지붕을 만드는 기법인 목조와즙으로 지어졌다.

이후 민간과 옛 통영군이 번갈아 가며 운영해오다 경남도가 인수해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란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운영을 맡은 것은 1951년 8월. 이 건물은 그 뒤 다시 민간과 옛 충무시가 잇달아 운영하다 결국 1975년 폐지됐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 온 공예예술인을 중심으로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정신으로 체계적으로 운영됐고 홍익대 공예학부를 만든 유강렬,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장윤성, 일본에서도 칠예가로 명성을 떨친 강창원, 나전칠기로 인간문화재가 된 김봉룡 선생 등 최고의 강사진으로 양성소가 운영됐다.

이중섭 선생과 초정 김상옥 선생도 가끔 특강을 하는 등 명실공히 한국 근·현대 공예예술의 산실로 자리 잡았었다.

특히 이중섭 화가의 경우 지인 유강렬을 비롯 김기섭 당시 충무시장과 달구지로 장독을 실어나르던 통영 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 유치환, 전혁림, 박생광 등과의 교류와 후원으로 이 곳에서 그의 대표작 달과 까마귀, 흰소 등 2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가슴 아픈 허전함을 이중섭은 새로 맞이하는 통영의 풍경으로 달래면서 그림에 열중했다.

흰소.

그 해 바로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와 그 유명한 ‘흰소’가 탄생했다.

그 ‘황소’ ‘부부’ ‘가족’ ‘달과 까마귀’ ‘도원’같은 대표작들도 모두 통영 시절의 작품이다.

겨울이 지나자 통영 일원 나들이를 즐기며 풍경화 제작에 몰두하여 ‘푸른 언덕’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충렬사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 등 가작을 남기기도 했다.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인 이중섭은 항남동 성림다방에서 4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 작품으로는 풍경화가 주종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때 청마 유치환이 전시회장을 찾았다. 통영 출생인 청마는 이중섭 보다 여섯 살 위다.

청마의 눈길은 뜻밖에도 이색적인 ‘달과 까마귀’에 쏠렸다.

달과까마귀.

 

저걸 보라

어서 나와들 저걸 보라

검은 장속裝束한 사교邪敎의 망자亡者 같은 한 떼 새들은

가까운 전선줄 위에 이루 죽지를 부딪고 놀라 모여

전무후무前無後無 저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저 가증스런 해와는 또 다른

한 발만큼이나 커다란, 커다라면서도

야릇하게 차가운 빛을 던지는 황황함에

경악과 불신不信의 가위같은 부리, 유황빛 눈을 휩뜨고들

노호하며 다투는 변괴!

 

성림다방 이층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이름 없는 만남이 이중섭 사후 11년 만에 ‘怪變-이중섭李仲燮 화畵 달과 까마귀에’(현대문학, 1967년 2월호)라는 한 편의 시로 영글게 됐다.

꽃의 시인 대여 김춘수도 ‘이중섭’을 여러 편 노래했다.

 

충무시 동호동

눈이 내린다.

옛날에 옛날에 하고 아내는 마냥

입술이 젖는다.

키 작은 아내의 넋은

키 작은 사철나무 어깨 위에 내린다.

밤에도 운다.

한려수도 남망산,

소리 내어 아침마다 아내는 가고

충무시 동호동

눈이 내린다

‘이중섭 5’이라는 시다.

김춘수는 이중섭을 시리즈로 5편의 시로 노래하고 있다.

1953년 2월 초정 김상옥 선생의 시집 의상(衣裳) 출판기념회에도 가난한 화가 이중섭은 축의금 대신 그림으로 축하했다.

닭 한마리가 꽃 한송이를 물고 있고, 오른편에는 게와 꽃잎이 그려진 그림이다. 초정은 이중섭에게 받은 은박지 그림을 소재로 ‘꽃으로 그린 악보-화제畵題’라는 시로 화답했다.

천재 예술가의 짧은 생은 마흔살 비극으로 끝났지만, 통영에서의 예술가 이중섭은 그의 그림 속에, 교류했던 통영예술가들의 작품 속에 따뜻한 풍경으로 영원히 남았다.

더 이상 위대한 예술가의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이제 우리가 이중섭을 기억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통영에서의 이중섭, 대한민국 예술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임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김영화·박초여름 기자  dal31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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