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주, 유치환, 전혁림, 장윤성, 김기섭 시장 등 통영유지들과 예술가들의 이중섭 사랑
이중섭이 머물던 1954년, 성림다방과 녹음다방 예술인이 가장 사랑한 통영예술아트센터

1 이중섭과 창작의 활화산 통영
2 예술가들이 본 통영의 이중섭
3 제주도에 살아 숨 쉬는 이중섭
4 부산 범일동의 이중섭 풍경
5 위대한 유산 이중섭, 통영은 어떻게 화답할까


 

이중섭의 대표작이 탄생한 옛 나전칠기 기술양성소. 맨 뒷줄 좌측에서 우측으로 1. 심부길 끊음질 무형문화재 3. 연구부학생 4. 구복조 통영출신 연구원 나전부 강사 5. 임성춘 연구원 칠부 강사. 서계문 통영칠공회사대표(1945년 이전명칭: 통영공업전수소. 최초 '나전칠기 양성소'로 사용) 오른쪽 맨 끝 하성은 이론강사, 가운데 줄 좌측에서 우측으로 1. 김성수 강사 현 통영옻칠미술관 관장 8. 김영호 공예협종조합연합회 회장 부산통영칠기사 대표 10. 김봉룡 부소장(국가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13. 홍순대 옻칠기능자 겸 부산국제시장 '나전칠기 옻칠재료 및 나전재료상회' 경영 14. 김종남 통영에서 나전칠기 상점 경영.


중섭에게 있어서의 그림은 그의 생존과 생활과 생애의 전부였다. 아니, 그의 죽음까지도 그림에 대한 순도(殉道)였다. 그래서 그가 1.4후퇴로 남하하여 호구나 거처에 아무 미련도 없고 능력도 없이 죽기까지 6년 간 그는 어쩌면 용케도 버텼다는 느낌마저 든다. 아니 중섭의 타고난 천재적 자질과 심신의 강인성이 아니었다면 그 곤경 속에서 목숨의 부지는 둘째로 하고 우리가 사랑하고 우러르는 그림을 그려 남긴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노룻이다.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자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그렸고, 부산 제주 통영 대구 서울 등을 표랑 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그래서 유화, 수채화, 크로키, 데생, 에스키스 등 약 200점, 은지화 약 300점이 이 땅에 남아 현대미술가, 아니 천재 예술가 중에서도 가장 민중에게 사랑받는 이중섭의 세계를 이루고 있으니 이 어찌 놀랍다 아니햐랴…한마디로 말해 이 시대에선 중섭처럼 그림과 인간이, 예술과 진실이 일치한 예술가를 나는 모른다.


화폭마다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는 예술가 이중섭 사후에 친구 구상이 술회한 이중섭의 모습이다.

그림과 인간이, 예술과 진실이 일치한 천재화가, 삶이 곧 그림이고 그림이 삶이자 곧 가족사랑이었던 이중섭. 그가 현해탄 너머 아내와 아들에게 구구절절 가족을 그리던 수많은 편지 속에서도 통영이 등장한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일쯤 남덕 군

그 동안도 건강한가요? 덕분으로 일주 전에 무사히 서울에 닿았소.
6월 25일부터의 대한미술협의회와 국방부 주최의 미전(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림. 닭, 소, 달과 까마귀 등의 그림을 출품해 호응을 얻은 전시회)에 3점을 출품했소. 모두 100호, 50호 크기의 작품들인데, 아고리의 작품 3점이 제법 좋은 평판인 것 같소. 첫날에 아고리의 작품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 한 점은 이미 약속이 되었다오. 미국사람이 아고리 군의 작품을 칭찬하면서, 자기가 모든 비용을 내여 줄 테니 뉴욕으로 작품을 가지고 와 개인전을 하라고 권해줍디다. 2,3일 후 찾아가서 약속을 할 생각이오. 이번에 낸 작품의 평판이 아주 좋았으니까 서울에서의 소품전도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친구들은 자기들 일처럼 기뻐하면서 하루빨리 소품전 제작을 시작하라고 권해 줍디다. 일주일 후에는 친구가 방 한 칸을 빌려 주기로 했소. 쌀값도 당해 준다고 합니다.
다시없는 나의 남덕 군, 태현이, 태성이를 위해서, 대제작을 위해서, 힘껏 버티겠소. 기어코 승리를 할 테니까 기대하고 그때까지 안정에 유의하고 하루빨리 기운을 내시오. 아고리 군의 평판이 좋다고 어머님께도 전해 주구려. 또다시 굉장한 소식을 전하리다. 도쿄에 있는 대한민국 거류민단장 정찬진 씨의 동생 정원진 씨를 만나 사정을 말했더니 기꺼이 힘이 되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초청장을 정씨에게 건넸소. 도쿄 주재 한국 대사와도 친한 사이로 정식 패스포드를 만들어 갖다 주겠다고 합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어떻게 될른지…오래 끌면 불행해질 뿐이오. 작년처럼은 갈 수 없을게요. 그 분이 일본 무역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도리가 없소. 정원진씨가 도쿄에 도착하는 즉시 당신한테 전화를 건다고 약속했소. 전화가 걸려오면 곧 어머님과 연락해서 정씨와 만나 서류 작성의 새 방법과 격식에 따라 협력해서 곧 작성해 주기 바라오.
내일은 꼭 아고리의 사진을 두 장 보내겠소. <중략>


이 편지는 이중섭이 1954년 봄 통영에서 진주를 거쳐 서울에 도착, 부인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곳곳에 통영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통영에서 미술전을 했다는 내용은 성림다방의 개인전을 말하는 것 같다.

정찬진은 통영사람으로 그 당시 재일거류민단장을 지냈고, 그의 동생이 훗날 충무금고 이사장을 지낸 정원진이다.

아고리는 턱이 뾰족하게 생겼다 하여 붙인 별명이다. 이중섭은 부인에게 자신을 주로 아고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1950년 6.25 전쟁의 상처에서 회복되기 시작한 지 겨우 1년이 지난 1954년, 이중섭이 머문 이 시기는 통영 문화 르네상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도 서귀포 생활을 거쳐 통영에서 겨울을 지냈던 이중섭이 한 해 전. 그리움이 사무쳐 선원증으로 건너간 일본에서의 일주일이 아내와 아이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돌아온 이중섭은 가족이 있는 일본과 가까운 통영으로 이사해 왔다.

통영의 도립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교육 책임자로 있던 유강렬의 통영으로의 권유가 이중섭에게 미술가로서 모처럼 생산적인 시간을 선사한 것이다.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 이중섭의 등장으로 통영 지역의 유지들과 문화 인사들은 적극적으로 그를 반기기 시작했다.

통영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를 비롯 전혁림, 장윤성,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 대여 김춘수 등이었다.

게다가 초대 통영시장을 역임했던 김기섭을 비롯한 재력가들의 후원으로 이중섭은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중섭이 머물던 1953∼4년 통영 최고의 예술센터를 손꼽으라면 단연 다방이다.

청마 유치환을 비롯 통영최초의 사진전이 열린 녹음다방(통영시 중앙동우체국 맞은편 호심다방의 전신)과 마돈나다방(현 통영적십자병원 인근), 그리고 이중섭이 개인전을 연 성림다방(항남동 우리은행 건너편)에서는 이중섭 양달석 박생광 등 전시회가 봇물을 이뤘다.

전혁림 화백은 생전 증언을 통해 1954년 전보다는 앞, 증언 당시 1952년쯤이라고 회상했다.

이중섭이 기거했던 옛 나전칠기 기술양성소의 현재 모습


유강렬, 이중섭, 장윤성, 전혁림이 4인회를 조직, 녹음다방에서 4인전을 개최했다고 한다.

당대 예술인들이 가장 사랑한 핫플레이스 녹음다방에서 전시된 작품은 '분노한 소'와 통영풍경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당시 이중섭이 자신의 그림 앞에서 찍은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54년 항남동 성림다방에서도 뜻 깊은 전시회가 열린다.

가족을 향한 가슴 아픈 허전함을 이중섭은 새로 맞이하는 통영의 풍경으로 달래면서 그림에 열중,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와 그 유명한 '흰소'가 탄생했다.

그의 '황소' '부부' '가족' '달과 까마귀' '도원'같은 대표작들도 모두 통영 시절의 작품이다.

겨울이 지나자 통영 일원 나들이를 즐기며 풍경화 제작에 몰두해 '푸른 언덕'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충렬사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 등 가작을 남기기도 했다.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인 이중섭은 항남동 성림다방에서 4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전시장을 찾은 여섯 살 위 청마의 눈길은 뜻밖에도 이색적인 '달과 까마귀'에 쏠렸다.

성림다방 이층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이름 없는 만남이 이중섭 사후 11년 만에 '怪變-이중섭李仲燮 화畵 달과 까마귀에'(현대문학, 1967년 2월호)라는 한 편의 시로 영글게 됐다.

청마는 "작고한 이중섭 화백은 6.25동란 당시 내 고향 충무에 얼마동안 피난해 지내며 그 백석장신(白晳長身), 윗수염을 가진 불세출의 예술가는 누구 모를 고독과 초려 속에서 조그마한 개인전을 가진 일이 있었다. 그 때의 작품 중에 달과 까마귀를 그린 한 폭이 유독 나를 마음 흡수하는 바 있어 항상 심저에 남아 왔었는데 이즘 우연히 모지(某誌)의 표지화로 그것이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되어 올랐고 반가웠다"고 기록했다. 

이중섭의 달과 까마귀.

저무는 하늘
동짓달 서리 묻은 하늘을

아내의 신발신고
저승으로 가는 까마귀

까마귀는
남포동 어디선가 그만
까욱하고 한번만 울어버린다.

오육도를 바라고 아이들은
돌팔매질을 한다.

저무는 바다
돌 하나 멀리멀리
아내의 머리 위 떨어지러라.

꽃의 시인 대여 김춘수 시인도 이중섭을 노래하고 있다.

'이중섭 1'이라는 시다. 이 시는 1951년 봄 피난지 서귀포의 방벽에 붙어 있던 것을 조카 이영진씨가 암송해 전해진 것이다.

김춘수는 시를 통해 이중섭을 만났고, 이중섭은 그림을 통해 김춘수를 만났다. 김춘수의 연작시 '이중섭'에 등장하는 동경, 서귀포, 남포동, 오륙동, 광복동, 한려수도 남망산, 충무시 동호동, 팔공산, 동성로 등의 지명은 특별한 거처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이중섭의 삶을대변하고 있다.

김춘수 시인은 "나의 연작시 이중섭은 이중섭의 그림 몇 폭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그의 전기적인 일면과 나 자신의 사적인 경험들이 어우러져 있다. 나는 그를 예술가로 본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희귀한 자질의 인간으로서 보았다. 지리학적 속도와 변동의 시대에 있어서 그와 같은 인물은 하나의 기적일 수도 있다. 개체로서 그는 그렇게 시달리고 버림당했는데 그가 원천을 잃은 것은 한 개도 없다. 그는 퇴화된 그대로 문명의 생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문명인인 나에게 그 모습이 신기했다. 이중섭 연작시는 내가 추구하고 있는 지점에서 한발짝 물러서고 있다. 그에 대한 나의 호기심 때문에 그런 희생을 나로서는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고 술회했다.  

꽃으로 그린 악보로 탄생한 이중섭의 축하그림.


1953년 2월 초정 김상옥 선생의 시집 의상(衣裳) 출판기념회에도 가난한 화가 이중섭은 축의금 대신 그림으로 축하했다.

닭 한마리가 꽃 한송이를 물고 있고, 오른편에는 게와 꽃잎이 그려진 그림이다. 초정은 이중섭에게 받은 은박지 그림을 소재로 '꽃으로 그린 악보-화제畵題'라는 시로 화답했다.

막이 오른다. 어디선지 게 한 마리가 기어 나와 거품을 품는다. 게가 품은 거품은 공중에서 꽃이 된다. 꽃은 복숭아꽃, 두웅둥 풍선처럼 떠오른다.

꽃이 된 거품은 공중에서 알보를 그리다 꽃잎 하나하나 높고 낮은 음계, 길고 짧은 가락으로 울러 퍼진다. 소리의 채색! 장면들이 옮겨 가며 조명을 받는다.

이때다. 또 맞은편에서 수탉 한 마리가 나타난다. 그는 냄새를 보고 빛깔을 듣는다. 꽃으로 울리는 꽃의 음악, 향기로 퍼붓는 연주-

닭은 놀란 눈이다. 꼬리를 치켜세우고 한쪽발을 들어올린다. 발가락 관절이 오그라진다. 어찌 된 영문이냐? 뜻밖에도 천도복숭아 가지가 닭의 입에 물린다.

게는 연신 털난 발을 들고 기는 옆걸음질, 거품은 꽃이 되고, 꽃은 음악이 되고, 음악은 복숭아가 되고, 그 복숭아를 다시 닭이 받아 무는-

저 끝없는 여행! 서서히 서서히 막이 내린다.

그림과 인간이, 예술과 진실이 일치한 위대한 예술가 이중섭, 통영에서의 예술가 이중섭은 그의 그림 속에, 교류했던 통영예술가들의 작품 속에 따뜻한 풍경으로 영원히 남았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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