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양어업선원 1960년대 파독광부, 간호사보다 7배 이상 외화 벌어
대한민국 산업화 역군, 한때 대한민국 총 수출액 중 5%를 넘어서

“내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고”

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전 국민을 울렸던 영화 ‘국제신문’의 주인공 대사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에는 국민들의 엄청난 노력과 희생이 담겨있다. 1960년대 국민들은 전 세계를 누비며 외화를 벌어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초석을 마련했다.

대표적으로 파독 광부, 간호사가 근대화의 역군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반해 전 세계의 바다에서 거칠게 싸워온 원양어업 선원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근대화의 숨은 역군, 원양어선원

원양어업은 지난 1957년 인도양에서 참치연승어선 ‘지남호’의 조업을 시작으로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조업, 60~70년대 외화벌이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원양산업협회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1958~1979년 약 21년간 원양어업으로 벌어들인 금액이 20억 달러에 육박해 당시 독일 광부 및 간호사의 총 송금액보다 7배 이상의 외화를 벌어왔다.

1960년대 초반에는 100여 척 미만이던 어선이 1970년대 후반에는 사상 최고인 850척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생산 면에서도 1960년대에는 10만 톤에도 못 미쳤으나 1970년대 후반에는 50만 톤에 육박했다.

지난 1971년에는 원양어업이 한국 총 수출 10억 달러 중 5천500만 달러, 전체의 5%를 넘어서기도 했다.

 

원양산업 위기…어선 노후화, 인력난 몸살

최고의 위상을 떨치던 우리나라의 원양산업은 현재 많이 위축됐다.

우리나라의 원양어선은 유엔 해양법 발효 이후 현재는 221척이 운영, 92만 톤에 이르던 어획량도 절반 수준인 47만 톤으로 떨어졌다.

현재 원양어선의 88%인 195척이 선령 20년 이상이고 이 중 24척은 40년 이상 된 어선이다.

원양산업 초기에는 자본이 부족하고 국내 조선기술이 미흡해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중고선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어선을 확보했다.

수출 증대와 어장 확보를 위해 어선확보에 중점을 두다보니 여전히 어선을 신규로 건조하기 보다는 중고선을 인수, 수리해 사용한다.

이로 인해 원양어선의 노후화 주기가 짧아졌고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 지난 2014년 53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은 오룡호 침몰사건 같은 대형 인명사고도 발생한다.

인력난도 심각하다. 선실이 좁고 복지공간도 부족한 원양어선들의 상황과 업무의 피로도로 인해 젊은 선원들의 유입이 급격히 줄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선원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다보니 세계 곳곳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우리나라 선원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의 라스팔마스와 테네리페 지역을 뽑을 수 있다. 이곳은 한때 우리나라 원양어선 200여 척이 조업했던 지역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대서양에서 조업 중 목숨을 잃은 선원 중 상당수가 여전히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우리나라 산업화에 큰 기여를 한 원양어선원들의 업적을 기리고 위상을 높이기 위해 지난 2002~2004년 해외 선원 묘지를 정비, 지속적으로 관리해오고 있다.

더불어 지난 2014년부터 유가족의 신청을 받아 묘지를 국내로 무상 이장하는 원양어선원 해외묘지 관리 및 이장 지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장재군 한국선원장애인복지협회 통영시지부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던 원양어선 선원들의 노고와 희생에 걸맞은 예우나 지원은 고사하고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좋지 않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어 “거친 바다에서 조업을 하다보면 수차례 넘어져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산다.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선원들에 대한 처우 개선과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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