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아닌 도리(不二法)" "인과의 원리"

 

둘 아닌 도리(不二法)

바다에 파도가 일어 물방울이 수없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라앉으면 잔잔한 바다 그대로이다. 이 경우에 물방울은 중생이라 할 수 있고, 바다는 근본자리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물방울 하나가 튀어 오른 것은 중생의 태어남이고, 스러지는 것은 중생이 몸을 벗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근본의 자리에서는 너와 나의 나눔이 없다. 네 조상, 내 조상의 나눔이 없다.

생명의 근본은 그렇게 크고 넓으면서 하나이다. 바다처럼 잔잔한 물로 한자리 하고 있다가, 때에 따라 작게도 크게도 나투면서, 물방울이 바람 따라 나타났다 스러지듯이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현상계에서 보면 뚜렷하게 둘이면서도 근본자리에서 보면 둘이 아니다. 근본으로는 둘이 아니면서도 색(色)으로는 둘이다. 그러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천지가 근본을 통해 하나로 같이 돌아가고 있으니, 일체가 둘이 아니게 나툴 수 있어, 나 아닌 게 없다.

자신의 몸일지라도 '나만의 것'은 아니다. 공동체이다. 지금 이 지구 안에 별의별 동물들이 많듯이 내 몸 속에도 별의별 생명체들로 그득하다. 그렇기에 자기 몸이면서도 '내 몸'이 아니라 공동의 몸인 것이다. 중생들은 육신을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심장, 간, 위와 같은 장기 하나하나에도 수억의 중생들이 있어 육신을 공유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자동으로 하나되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의 육신은 그대로 소우주의 꾸러미와 같아 오장육부의 기능이라는 게 그대로 우주의 기능과 같다. 거기엔 모든 과학과 철학이 다 들어 있다.

인과의 원리

우리의 육신은 몸 안의 수많은 세포들로 그물을 짜 놓은 것처럼 그렇게 가설되어 있으며, 지구는 물론 우주 전체도 꽉 짜여진 그물처럼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가설되어서, 모두가 계합된 채 돌아가고 있다. 또한, 우주와 인간계는 서로 근본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같이 돌아가고 있으니, 내가 알면 우주법계가 알고 부처가 알고, 전체가 안다고 하는 것이다. 남들이 보지 않는 데서 몰래 무슨 일을 했다 해도 모르는 게 아니다. 자기가 한 일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가 알고 있으니 이미 근본자리에 입력이 되었고, 근본자리를 통해 일체가 연결되어 있으니 우주 법계가 전부 아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나만 아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거짓이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속이는 것도 자기고 속는 것도 자기이다. 하지만 나의 근본, 주인공은 모든 것을 전부 알고 있기에 결코 속일 수 없고, 속지도 않는다. 주인공이 바로 하늘이요, 우주 법계이니 거기엔 티끌 하나만큼의 빈틈도 없다.

마음의 작용이란 거대한 컴퓨터에 비유할 수 있다. 한번 일으켜진 생각은 빠짐없이 수록이 된다. 생각한 사람은 그 생각이 사라졌으므로 그만이라고 여기겠지만, 그 생각은 어디 밖으로 나가 버린 게 아니라 어김없이 자기 마음 안에 입력된다. 그렇게 해서 잠재되어 있다가 다음번 생각을 일으키는 데 동원된다. 그러므로 두 번째 생각은 첫 번보다 더 의지적인 생각이 되는데, 가령, 처음 생각이 나쁜 것이었고 두 번째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다면, 두 번째 생각은 첫 번째보다 조금 더 나빠진 것이 될 수 있다. 그와 같이 연거푸 입력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데, 마음이란 이렇듯 자주 생각 내는 쪽으로 기울게 되어, 그 생각은 점점 자라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지게 된다. 따라서, 나쁜 생각은 스스로 다잡지 않으면 나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여 한번 생각을 일으킨 것이면 하나도 빠짐없이 수록이 되는 것이므로 마음 작용은 현재 의식만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악업의 인연은 질기기가 삼줄 같다. 그러나 선업의 인연은 부드럽기가 고요히 타오르는 불과 같다. 삼줄은 불을 묶을 수 없으나, 불은 삼줄을 태워 버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되도록 선업을 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업도 업이다. 일단 기록된 이상 입력된 것이 거꾸로 나를 지배하게 된다. 악업은 나쁜 과보를 낳고 선업은 선한 과보를 낳을 뿐이지,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선업과 악업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비유해 보면 둘 다 노예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한 경우는 나쁜 주인을 만나서 갖은 고생을 하는 노예라면, 다른 한 경우는 좋은 주인을 만나서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가는 노예인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노예로 살아갈 것인가?

녹음이 되어 있는 테이프에 다시 녹음을 하면 앞서의 녹음 내용은 지워지고 새 내용이 녹음된다. 그러므로 악업보다는 선업을 녹음해야 한다. 그러나 선업을 녹음하기보다는 악업도 선업도 모두 쉬고, 이 도리를 알아 진리에 맡겨 둠으로써 공테이프를 만들어라. 비유하자면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먼지에 뒤덮인 거울을 한 번 깨끗이 닦아냄으로써 맑은 거울로 되돌려 놓는 이치와 같다.

인과는 썩지 않는 씨앗과 같다. 선한 씨를 뿌리면 선과가, 악한 씨를 뿌리면 악과가 온다. 인과의 씨는 썩지 않고 나고 또 나며, 돌고 또 돈다.

'한 번 사는 인생, 나 좋을대로 살다가면 그뿐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 생에르 끝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나 혼자 몰래 하는 일까지도 그대로 기록되었다가 업이 되어 내게 되돌아온다는 진리도 알아야 된다.

사람들은 인과응보에 얽힌 업을 사량심(思量心)으로 풀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추운 겨울에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녹여보겠다고 끊는 물 한 바가지를 들어붓는 격으로, 잠시 녹는 듯 하다가도 이내 부은 물까지 덧 얼어 얼음 덩어리만 키우고 만다.

업은 모든 반연(絆緣)에 얽매이지 말고 근본마음으로 돌아가 절로 녹게 해야 한다. 제 아무리 큰 얼음 덩어리라도 봄이 오면 자연스럽게 다 녹게 되니, 근본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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