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원리"

진화와 창조

때가 되면 왜 육신을 벗게 되는가? 그것은 차원을 바꾸기 위한 절차이다. 애벌레가 자라서 나비가 되고 매미가 되는 과정처럼, 더 차원을 높여서 제 몸을 형성시키고자 하는 절차인 것이다.
예를 들어, 다리가 짧아 불편했으면 더 길게 만들고 길어서 불편했으면 짧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니, 실은 자유자재로 해 나가는 과정이다. 물리(物理)가 터지고 지혜를 샘솟게 하는 과정이다.

사람이 삶의 체험을 통해 완숙해지고 더욱 지혜롭게 되어, 살면서 불편했던 것, 하고 싶었던 것, 그런 것들을 바꿔 그대로 반영해 가지고 되나오게 된다. 수억겁 년 동안 이러한 진화의 과정을 거쳐 인간의 몸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다시 좌천해서야 되겠는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쓸데없고 하찮은 것들이 왜 생겼을까 하지만, 모든 존재는 진화의 과정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의 과거 모습이자, 옛 친구들이며, 인간에 이르는 진화 과정의 증명들이다.

사생(四生)이 미물에서부터 진화되어 가는 것을 보면 연달아 줄을 잇고 있는 것과 같고, 또 생명체마다 그 몸 안에 사생이 각기 있어서 몸 안에서 또 진화하고 있으니, 어디가 중심이고 누가 기준점이냐 하기도 어렵고, 어디가 시발점이고 어디가 종점이냐고 하기도 어렵다. 세상 모습을 보면 시발점도 종점도 없으니 그대로 중용(中庸)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보면 생물들이 환경의 영향을 받아 적응하는 일면이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 의식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꼬리가 있었는데 그 꼬리가 불필요하다고 느끼게 됨으로써 꼬리가 사라졌고, 날개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됨으로써 날개가 생긴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현재의 모습에서 불편한 점이 있어서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진다면, 미래의 인간 모습도 변모할 것이다. 모든 존재의 형태는 마음에 의해 형성된 것인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 되었겠는가? 바로 내 근본마음, 주인공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세상을 살펴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 새는 새대로, 산짐승은 산짐승대로 바삐 움직이고, 온갖 벌레와 미물들도 나름대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이는 모두가 좀 더 진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차원이 높으면 높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그 나름대로의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은 육신의 주인이니 육신은 다만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바라며 노력하고 궁리한다. 그러한 마음의 공덕으로 생명은 진화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진화의 완성은 대자유, 무량공덕의 부처가 되는 것인 바,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그 완성으로 가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 우리와 같은 구도(求道)의 형제들이며 삼계(三界)는 그런 구도자로 가득찬 대도량이라 할 수 있다.

진화와 창조가 다 한마음의 나툼이다. 진화란 마음의 차원이 높아지는 것을 뜻한다. 마음의 차원이 달라짐으로 해서 육신의 기능도 달라지게 되고 모양 역시 달라지는 법이다.

옛날에 살던 몸집이 큰 동물들이 사라지거나 모습을 바꾸게 된 것은 사는 동안에 마음의 차원이 달라진 까닭이다. 창조란, 곧, 마음의 설계에 의해 밖으로 내놓음을 말한다. 마음의 설계가 있음으로 해서 진화된 몸이 겉으로 나온 것이니 진화이면서 창조요, 창조이면서 진화인 것이다. 기어다니는 벌레가 한번 날기를 바랐을 때에 그 날고 싶다는 마음은 진화의 원동력이 된다.
마음의 차원이 높아져 육신의 기능이 발달하여 드디어 몸을 벗고, 나비로 훨훨 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러한 드러냄을 창조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마음의 설계에 의해 결과물을 밖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창조되고서도 그 자리에 그냥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니, 창조는 그대로 나툼이다. 마음이 진화와 창조를 이루는 것이니 진화와 창조는 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퇴화도 또한 마음이 그 근본이니, 다 마음의 나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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